茶道美學

동다송-명우차소

무진공방주얼리 2006. 2. 10. 00:49

東茶頌 / 동차송

<감심자소甘心子疏>
*동차송은 사문沙門인 초의艸衣 장의순(張意恂/1786~1866)이 송頌을 지은 헌종3년(1837) 당시까지의 차고전을 망라 참작하며 차예茶藝를 닦아온 기반위에 바다동쪽 우리차의 우수성을 알리고 아름다운 차풍속을 부흥復興 시키고자 스스로 주註를 겸해 기려 읊은 것으로 흔치 않은 우리 차서茶書의 고전이 되어 이로 동차를 이해해 나가는데 첩경이 될뿐 아니라 아울러 차서의 정화精華를 겸했다 기릴 송頌은 원래 꾸밀 용容의 뜻으로 풍風 아雅와 함께 시경詩經을 이루는 한 형식으로 나와 있다.
*茶의 우리 음은 차와 다가 있는데 지금 속음으로 통행하는 음인 "차"의 구개음화가 이루어 지지 않은 우리 음은 "타"로서 원음이나 옛 음은 다에 가까왔던 것으로 보이고 원래부터 음의 계통을 달리해 들어왔던 것은 아닌듯 한데 광의廣義의 차는 차로 하고 본래 차는 다로 한다는 관례가 생기거나 어느 경우에 차로 부르고 어느 경우는 다로 쓴다는 규칙없이 다만 종래 문언에 따라 다의 음을 쫓는 경우에는 차의 의미에 새삼스레 좀 더 정아正雅한 멋을 추구하고 이미지를 달리하려는 경우로 비춰지는듯한 것이 일부 있어 온듯했다 그러나 개화이후 다방 또는 다실이라 하면 지금 잘 알다시피 단지 시중의 커피판매를 위주하는 곳을 가리키는 말로서 속화되었을 뿐이며 오히려 근래 다시 명차茗茶를 위주하는 곳은 이른바 전통찻집의 찻집으로 서로 구별해 부르게끔 되었음을 볼때 결국 내용이 문제지 단지 색깔과 명칭만 달리해 스스로 구별한다고 그만으로서는 잠시 기분만 내는데서 별로 벗어나지 못함을 보이며 이상으로 아직 우리 차풍속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듯한 만큼이나 그때그때 되는대로 부르고 뒤죽박죽 조리가 서지 않은듯해 어디서 차로 하고 어디서 다로 하기도 곤란하니 종래 불러오던 대로 통행음에 따라 차의 음으로 되도록 획일해 나가면서 다의 음을 겸하기로 한다.

東茶頌 承海道人命作.
동차송은 해도인의 명을 받들어 지음.

<감소甘疏>
*해도인은 정조의 부마 홍현주(1793-1865)로서 호는 해거재海居齋이고 도인은 도교수도자인 도자道者와 구별해 불교수도인을 이르는 말, 초의가 글을 지어 해거재에게 드리던 처음에는 옛 악부의 한 형식인 행行의 이름을 취해 동차행 이라 했다 해도인의 명이란 것은 다름 아니라 마치 당 노동이 맹간의 가 보내준 차를 받고 "지존의 나머지가 왕공에 합당한데 무슨일로 산인의 집에 이르렀나" 라면서 시를 읊어 말했던 것 처럼 당시 동차의 부흥조復興祖인 차산 정약용이 졸하자 진도부사 변지화를 통해 초의에게 차를 묻는 구실로 드디어 초의가 차산을 계승해 나서 차의 일인자로 나서게끔 한마디 할 계기를 주려한 것으로서 물론 초의는 이미 차의 대가로서 평소의 유여한 역량이 바탕되지 않고서는 될일이 아니지만 역시 말이 나기 전에 나름대로 다소 준비되어 온 바가 있을 것이다.

(海居道人 垂詰製茶之후 遂謹述東茶頌一篇以對)
해거도인이 차 제조하는 상황에 대한 캐 물음을 내리시기에 드디어 삼가 동차송 한편을 서술해 이로 대함.

<감소>
*후는 候의 人 없는 자, 여기서는 또한 후候의 뜻 임.
예기 악기편에 짓는 것을 일러 성聖이라 하고 술하는 것을 일러 명明이라 한다 했는데 동차송은 아래로 읽어보면 알겠지만 내용상 창작보다 찬술위주로 종래로 여러 고전의 꽃을 따서 동차에 맞게 구슬을 꿰어 아름답게 엮으려 한 것을 알수있다 공자는 말하길 모르면서 짓는자 대개 있으나 나는 이것이 없다하고 또 스스로 말해 서술하고 짓지는 않는다 했으니 모르고 말하니 오히려 무에서 유가 생겨 절로 허구적 창작이 될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는 동차송을 짓는다하고 여기서는 술한다 함은 어째서인가 내용상은 찬술의 성질이라도 동차송의 등장 만큼은 하나의 시작이 아닐까 가히 술述로 작作을 이뤘으며 작이면서 술로 겸퇴謙退한 것이라 하겠다.

艸衣沙門意恂 / 초의사문 의순.

<소>
장의순은 자가 중부中孚 호는 초의艸衣로서 15세에 남평南平 운흥사雲興寺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으며 정약용에게 학문을 배우고 신위申緯 김정희金正喜등의 명사와 친교가 깊었으며 후에 해남의 두륜산頭輪山 일지암一枝庵에서 수도하며 서울 봉은사奉恩寺에서 화엄경을 새길 때 증사證師가 되었으며 그의 문집이 전한다 사문沙門은 좋은일을 행하고 나쁜일을 행하지 않는다는 뜻의 범어에서 비롯한 말로 출가한 중을 달리 일컫는 말이라한다.

后皇嘉樹配橘德 / 후황后皇이 나무를 가상嘉尙히 해서 귤의 덕에 짝하니
受命不遷生南國 / 명을 받음이 옮기지 않아 남국에 살며
密葉鬪霰貫冬靑 / 빽빽한 잎은 싸락눈과 싸우며 겨우내 관철해 푸르고
素花濯霜發秋榮 / 흰꽃은 서리에 씻으며 가을영화를 낸다
姑射仙子粉肌潔 / 막고야산의 선인의 분같은 살결로 깨끗하고
閻浮檀金芳心結 / 염부단금의 금꽃술 맺혔으며

<소>
*초사의 귤송의 첫머리에 후황가수后皇嘉樹 귤래복혜橘徠服兮 수명불천受命不遷 생남국혜生南國兮등의 말로 시작하니 그 뜻은, 후토가 나무를 가상히 대하니 귤이 와서 복속한다 명을 받음을 옮기지 않아 남국에 산다...,
후황은 곧 후주后主로서 여기서는 조물주로서의 천제인 하늘의 뜻과 상대적으로 양생주로서의 땅인 후토를 말한다 주역 곤괘 단사에,
"지극하구나 곤坤의 원元함이여 만물이 자생資生하고 이에 순히 하늘을 잇는다 곤이 두텁게 물건을 실으니 덕이 무강함에 배합한다." 하였으니 후토가 능히 만물을 싣고 천명을 받들어 길러내는 것이다 후后는 글자의 유래가 한사람이 입으로 명령을 내고 있는 모습을 취한 것이라는데 역시 주역 천풍구天風女+后 괘의 대상에 하늘 아래 바람이 있는 것이 구니 후后는 이에 명을 베풀고 사방에 내려 고 한다. 했다 그래서 천자의 뒤를 따르는 어머니를 후라 한 것인데 후后가 후後의 뜻이기도 한 것은 여기서 나온 것이 되겠으며 단지 황후라 하면 왕의 후이며 양생주로서의 제왕의 명칭이 아니므로 후황이라 한 것이다.
*주역 문언전에 형亨이란 것은 가嘉의 회會다.하고 또 가회嘉會로 족히 예에 합당한다.는 구절이 있으니 원元이 봄 리利가 가을 정貞이 겨울로서 형은 여름의 덕을 나타내는 말이니 가嘉는 가佳의 뜻과 통하고 갑남을녀 각자 크는대로 크서 누구랑 살아도 이래 못살까 하거나 어디 심은들 귤이고 탱자로서 별반 다를 것도 없다면 굳이 가회라 말하기 부족할 것이다 또한 무슨짓을 하는지 별스럽게 쉬쉬 몰래 만나고 심는다면 합례할수 있을까 초사의 귤송에 가수嘉樹라 하고 육우의 차경에도 차는 남방의 가목嘉木이라한 것은 특히 맞는 조건이 따로 있어 이로 아름다움을 이룰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명의 왕상진의 차보소서에,
"차는 가목이다 한번 심으면 다시 옮기지 않는다 그래서 혼례에 차를 쓰는 것은 하나를 쫓는 뜻이다."
했는데 이는 얼풋 설명되고 정확치 못한듯하다 나무는 원래 스스로 옮기며 사는 물건이 아닌데 비록 북돋아진 버들이라도 그 장소가 아니면 어쩔수 없을 것이고 그 꺽어 내 던져져도 가회함을 얻을것 같으면 그대로 잘 살 것인데 무었때문에 옮길 것인가 먼저 가회임을 의미하고 옮길것 없음을 기원하는 뜻이지 단지 옮기지 못하기에 가목이라 말 될수 있는 것은 아닐것이다 전국말엽 사람으로 앞의 귤송을 지은 남쪽 초나라의 삼려대부 굴원이 지은 것으로 전하는 초사楚辭의 어부사에서 어부가 굴원에게, 창랑의 물 맑을사 가히 내 갓끈을 빨으리 창랑의 물 흐릴사 가히 내 발을 씻으리. 라고 노래했다는 것이나 굴원이 끝내 단오날 멱라수에 투신한 일을 두고 한나라 초기의 가의가 폄적되어온 자신의 처지와 비겨 슬퍼해 지은 조굴원부弔屈原賦에,
"분분히 왔다갔다 하며 그 이러한 우환에 걸리심이여
또한 부자夫子의 탓이로다
구주를 이력하며 그 임금을 가려 볼 것이지 하필 이 도읍만 회포하나
봉황이 천길 나래쳐 올라 덕의 휘광을 보아 내리는 걸"
이라해서 같은 한나라 사마천에게 처세관을 의심받기 까지 한 것 등은 모두 굴원이 초나라와 동성同姓으로 사생흥망을 자신의 일로서 같이하는 경우임을 모른 것이다 명의 전예형은 자천소품의 의차宜茶에서,
"차는 가인佳人 같다는 논의는 비록 묘하나 다만 산림사이에는 마땅치 않은 듯하다 옛날 소식의 시에 종래로 가명佳茗은 가인 비슷하다하고 증기의 시에, 사람을 옮기는 우물尤物을 무리들이 떠벌려 말한다.한것이 이것이다 만약 산림에 어울리게 한다면 당연히 모녀毛女(*한 유향의 열선전에, 모녀는 자가 왕강王姜 인데 궁녀로 진이 망하고 유랑하다가 도사 곡춘을 만나 솔잎을 먹고 추위를 견디는 것을 배워 화산에 숨어 살며 몸에 털이나 모녀라 부르는데 세세로 엽사獵師가 본다 하며 그가 머문 바위 속에는 늘 거문고 타는소리가 난다 한다)나 마고선녀 같음이라야 자연의 선풍도골로 연하에 물들지 않음이 가능하고 반드시 복숭아볼에 버들허리 같아야 한다면 극히 가리개한 금박휘장 안이 마땅하고 나의 샘과 돌을 속되게 말라"
소식이야 도회 권귀적 문풍으로 유명한 사람으로 가명佳茗은 가인佳人 비슷하다는 것도 차보다는 술에 더 친했을 제 방식으로 차를 비유해 말한 것이니 소식의 "조보가 학원의 시배試焙한 새차 보내준 시운을 따서"라는 시의 전문을 보면,
仙山靈草濕行雲 / 신선산 영초가 다니는 구름에 젖어
洗遍香肌粉末均 / 두루 씻어 향나는 살결 분말을 고룬다
明月來投玉川子 / 명월(*말차기포)이 와서 옥천자(*물)에게 투합하니
淸風吹破武林春 / 맑은 바람 불어 무림산의 봄을 깬다
要知氷雪心腸好 / 모름지기 빙설같은게 마음에 좋은 것을 알겠고
不是膏油首面新 / 기름발라 면목을 새롭게 함이 아니네
戱作小詩君勿笑 / 장난 삼아 작은 시를 지으니 군은 웃지 마시길
從來佳茗似佳人 / 종래로 가명은 가인 비슷했느니.
라고 한 것인데 묘사가 대체 이러하고 당시 송의 만연한 음차풍속에 따라 그가 남긴 많은 글중에 차에 대한 언급도 더러 있지만 의외로 그는 박주도 차탕보다 낫다 라고 말한 것 처럼 차가 암중에 사람을 손해한다하여 차를 그리 깊이 애음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논차論茶라는 글을 보면,
"번거를 제除하고 기름기(*月+貳)를 거去하니 세상에는 실로 차가 없을수 없다 그러나 암암리 사람을 손해하는 것이 적지 않다 예전에 이르기를 차마시기가 성한 뒤로 사람들은 흔히 기氣를 우환하고 황병黃病을 우환하지 않게 되었다 하니 비록 손익이 서로 반이나 양을 소消하고 음을 도움이 손損을 보상하지 못한다 내게 한 법이 있어 당연히 스스로 닦아 나간다 매 식사를 마치면 번번히 짙은차로 양치하니 번거와 기름기가 이미 제거되고 비위는 상관하지 않는다 고기의 잇사이에 있는 것은 차를 얻어 양치해 적시면 빠져나간 줄도 모르니 번거롭게 쑤실것없고 이빨의 성질도 괴롭던 것이 이로 말미암아 점차 긴밀해지고 벌레먹는 병은 절로 그친다 그러나 비교적 중 하차를 쓰고 그 상품은 또한 늘 있지 않다 며칠마다 한번 마시는 것은 또한 해되지 않는다 이는 크게 이치가 있으나 사람들이 아는자 드물다 그래서 상세히 서술한다."
무슨 큰 비방을 내놓는 것처럼 말하지만 좀 심하게 여겨지는 것은 차는 좋아해서 벽癖을 이룬다면 술은 바로 광狂이라하고 차가 오래되어 암암리 음적陰的으로 손한다고 해봐야 술이 양을 촉발시켜 바로 그자리서 표나게 사람을 상하고 망치는 것의 해로움에 비하면 탓할것도 없을텐데 이렇게 차를 거리하는 것은 차보다 술을 좋아하는 자의 괜한 핑게 밖에 되지 않거나 혹 이때 차의 손해에 대해 다소 과장된 인식이 있었거나 이때의 차음료법이 백토나 소금을 타고 잡 잎새를 섞어 다려 탕약처럼 해 마시는게 흔해 장기적으로 마시면 여독이 만만잖은 일이 있었던듯하며 어쨌든 이는 마치 시경의 정풍 출기도운 시의,
"그 성문을 나서니 띠꽃(*도艸밑余)같은 여자들이 있다 비록 띠꽃 같아도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네 흰옷에 붉은 꼭두서니 두건이 꽤 더불어 오락할수있다." 라고 한대로 무슨일로 띠꽃같이 화사히 북스러운 여자들이 떼로 나와 있는지 몰라도 여기서 띠꽃을 말하는 도(艸밑余)는 곧 뒤에 쓰는 차茶자 이기도 하니 이상 차가 가인嘉人 보다 일단 흔히 이해하는 용모적 미인에 비유될 만했던 개연성을 소급해 찿아 볼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 어찌보면 마치 난초가 그윽히 빈골짝에서 스스로 분방할 뿐이지만 이로 천위天位를 향한 길을 꾸밀수있고 차가 원래 청량의 운치를 더 깊이 하는 물건으로 금은주옥을 두른 부귀의 몸에는 혹 마땅치 않은가 싶을수 있더라도 이렇기에 또한 번다한 중에서 청량을 열고 주지육림에 절은 몸을 다스릴 물건으로 환영될수 있는 것이다  또한 명의 진계유의 차화에,
"풍제주가 차정茶政에 정精해서 손수 요리해 씻은뒤 객에게 마시니 객이 웃는자 있어 내가 희언으로 풀어 이르길, 이는 정히 미인과 같고 또 옛 법서 명화 같은데 속된사내 손에 건네질수 없지 않은가"
하였는데 이로 차가 가목嘉木에서 가목佳木이 되고 또 미인으로 비유되어 마침내 차호茶壺까지 미인에 비유되는 일도 생겼으나 원래 차는 특히 가회를 필요하여 제조나 다리고 우리기와 마시기가 각자 그 사람이 아니면 제대로 아름다움을 이루기 어려운 물건이기에 손수하는 것이라 봄이 옳을 것이고 차의 가佳함도 또한 단지 바로 그 미모적 아름다움에 결부되기 이전에 그 가상함에서 나온말이라 하겠다.
*고려말 조선초 사람인 하륜(1347-1416)의 불훼루기不毁樓記에,
" 금강사金剛社에 산차山茶나무가 있어 한 뜰을 그늘 지운다 전조의 충렬왕이 연輦을 여기 세우고 장군이라 호를 내렸으니 부노들이 서로 전하며 미담으로 여겼다 내가 예전 소년에 객이 되었는데 때마침 중춘仲春이라 산차나무가 무성히 피었다 머물러 감상하기 반나절이나 오히려 족하지 못했다."
했으니 정운에 사社는 토지신주라 했으며 시경 소아편의 한 소疏에는 공공씨에게 구룡句龍이란 아들이 있어 후토가 되어 구주를 평평히 할수 있어 그래서 향사해 사社를 한다 했으니 고려 충렬왕은 당시 정동군征東軍의 출정을 전송하러 가는 길에 김해 금강사에 들러 여기서 결사結社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 상주시 낙동면에 승장사勝長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역시 이때 충렬왕이 김해로 가는 길에 이절에 묵으면서 사액한 것이다 산차는 지금 흔히 동백이라 부르는 차나무 종류로 역시 잎으로 음료하는데 잎이 무소가죽처럼 질기고 비늘같은 잎이 빽빽이 에우니 마치 나무가 어린갑魚鱗甲을 입어 무창武昌한듯 함에 두고한 말로 무창은 차경에서 선성사람 진정의 일에 나오며 후한 왕포의 동약에도 무양武陽에서 차를 산다는 구절이 있고 유구에서는 차를 찰札이라고 불렀는데 찰은 목간木簡인 서찰의 뜻과 함께 갑옷의 미늘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초의가 빽빽한 잎이 싸락눈과 싸운다 표현한 싯구는 역시 들은바가 있어서 일 것이다.
*계절에 있어 가을은 서방 백제白帝가 주제하니 상징색은 서릿발처럼 흰색이고 동물은 털짐승으로 상징동물은 백호가 되며 산은 서쪽의 화산華山이 된다 그래서 흰꽃이 서리에 씻으며 가을영화를 내었다 함은 차를 가을의 청랭한 기상과 결부해 한 말이다.
*장자 소요유 편에 막고야의 산에 신인이 사는데 살갖이 빙설같고 작약히 처자 같으며 오곡을 먹지 않고 바람을 호흡하고 이슬을 마시며 구름의 기류를 타고 나는 용을 몰아 사해의 밖에 노니 그 신이 응키면 물건이 병해되지 않게하며 년해의 곡식이 익는다 함.
*염부단금은 불경에 나오는 큰 나무인 염부수 밑의 강에서 자주빛 사금이 나는데 이를 염부단금이라 하며 지금 현세를 염부세계라 부른다 한다.

(茶 樹如瓜蘆 葉如梔子 花如白薔薇 心黃如金 當秋開花 淸香隱然云)
차는 나무가 과로瓜蘆같고 잎은 치자梔子같으며 꽃은 백장미 같고 꽃심은 누렇기 금같고 가을을 맞아 꽃이 피어 맑은 향이 은은하다 이른다.

<소>
*과로는 육우가 차경에서 스스로 주하길 남중국의 광주지방에 나는 차 비슷한 나무로 지극히 쓰고 떫다고 하였으며 도홍경(456-536)의 약록에는,
"남방에 과로가 있는데 역시 차와 비슷하다 그 잎을 따 취해서 가루해 다려 마실것 같으면 바로 밤새도록 잠자지 않아 소금을 고는 자가 오직 이 음료에 바탕하는데 교주와 광주에서 가장 귀중히 하여 객이 오면 먼저 설設하고 이에 향초의 물건을 더한다."
했으며 광주기에는 차의 별명으로서 잎이 크고 떫으며 남인이 음료한다 했다 그러나 옛사람이 식물을 분류한 것은 지금의 학명상으로 분류된 것과 다 일치 하는 것은 아니어서 오대시기 촉국 모문석의 차보에 보면,
"차의 별종으로 탱자싹 구기싹 비파싹이 있어 모두 풍병을 다스리고 조협싹 홰나무싹 버들싹이 있어 이른봄에 그 싹을 따서 차와 섞어 만든다."
했으니 탱자 구기 비파는 모두 차와 가까운 남방식물계통으로 모양도 차와 비슷해 차의 한 별종으로 여긴 것이다 치자는 그 열매로 적황색 물감을 내는 상록관목.

沆瀣漱淸碧玉條 朝霞含潤翠禽舌
밤이슬에 맑게 씻은 벽옥가지요 아침노을색에 윤기 머금은 비취새 혀로다.

<소>
*박물지에 자주반점이 있는 물총새의 수컷을 비翡라하고 이것이 없는 암컷을 취翠라 한다는데 비취옥도 이에 따라 붉은 색이 있는 것을 비라 하고 없는 것을 취라하나 흔히 취옥이 보석으로 귀중히 여겨지고 대표되어 통털어 비취라 불린다 그러나 비취새와 비취옥의 색감이 서로 흡사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어서 달리 취우翠羽 취조翠鳥 색이라고 하면 코발트색을 말하고 단지 취색이라고 하면 흔히 연녹색의 비취옥색을 말한다.
*차가 금방 싹터기 시작해 아직 보리톨 같은 눈을 맥과麥顆 또는 곡립穀粒이라 하며 작고 여린 싹줄기를 창槍 또는 침針이라 하고 아직 작은새(小추, 雀)의 혀처럼 부드럽고 매발톱처럼 한줄인 까닭으로 작설 또는 응취鷹嘴 응조鷹爪라고도 하며 아차芽茶 또는 소아小芽라 한다 여기에 잎이 펴이면 기旗가 되는데 한줄기에 한 깃발이 펴이면 일창일기一槍一旗로서 간아揀芽라고도 하며 두잎이 펴이면 일창이기로서 중아中芽라고도 한다 여기서 더 퍼지면 점차 늙은 것으로 이후로는 아마 싹이라 하기보다 단지 지枝에 가까와 갈것같다 중아만 되어도 그다지 상품上品으로 치지 않기에 좋은 차를 구하기가 어려운 것이라 한다 그러나 차경에서는 너무 여려 볶기 마땅잖아 찐다는 것과 달리 명때의 포차에서는 나개차는 볶기 마땅잖을 정도로 늙은 잎을 따기에 쪄서 만드는 것이라 하니 그래도 유명한 제품이 된것을 보면 또 나름대로 늙은 잎으로도 좋은 제품을 만드는 방법이 있어 왔음을 본다.

(李白云 荊州玉泉寺 淸溪諸山 有茗艸羅生 枝葉如碧玉 玉泉眞公常采飮.)
이백李白이 이르기를 형주 옥천사의 청계의 여러산에 명茗풀이 있어 퍼져 나있으니 가지와 잎은 벽옥같은데 옥천사의 진공眞公이 늘 따서 마신다.

<소>
*이백(701-762)은 당의 금주 창융현 청련향사람으로 시에 능해 당 현종의 측근으로도 있었다 그의 "족질되는 승 중부가 옥천의 선인장차를 드린데 답한 시와 서"를 보면 종유석 사이에서 옥천이 교류해 흘러 나오는 주위로 차가 무성한데 차과를 볕쬐어 이룬다는 것으로 보아 이때 배화불에 의지하지 않고 차과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 유종원의 연주군복유혈기에도 종유석을 보양식의 가장 좋은 것이라 하였다 본초강목의 석종유에 대한 여러설을 보면 돌젖이 떨어져 쌓여 된 것으로 가벼이 먹는게 아니라 땀을 많이 흘리고 갈증이 나는데 빻아 체질해 흰명주에 싸서 여러 약초와 합해 술에 담궈 복용한다 하며 또는 잘 갈은 고운 가루를 금은그릇안에 두고 기와 한 조각으로 꼭 덮어 기운이 새지 않게 해서 찌면 자연 물로 화한다는 처방도 있으며 삼과 삽추를 꺼려 범하면 죽는자 많다고도 하며 맥문동 독산獨蒜 구실(전구지 열매) 호총胡蔥 호수(고수) 묘아안초猫兒眼草는 모두 복용할수있다 하는데 대체로 여러설을 종합해 보면 원기허한해서 방사를 잘 일으키지 못하는데 주로 쓰이는 것 같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종유석을 궁중에 진상되어 썼다는 얘기가 당지에 전하며 종유석은 곧 우리말로 고드럼돌로 곶감 꼬쟁이 고(코) 곳(꽃, 특히 피기전의 뽀족한 봉오리,또는 물로 뾰죽이 들어간 땅 串.)처럼 뾰족한 돌 고시가 드리워진 것을 말하는 것이니 강원도에 고씨동굴이 있고 충북에 고수동굴이 있어 이는 종유석동굴임을 말하는 통칭으로 비롯해 이름한 것이다.
*차는 나무고 풀이 아니지만 키 큰 교목차에 비해 왜소한 관목차는 흔히 초차草茶 명초茗草등으로 불렀다.

天僊人鬼俱愛重 知爾爲物誠奇絶 炎帝曾嘗載食經
하늘과 신선,사람,귀신 모두 사랑하고 귀중히하니 너의 물건됨이 실로 기이하여 다시없음을 알겠구나 염제가 일찌기 맛보고 식경에 실었고

<소>
*사람은 말할것도 없고 하늘은 이하 염제식경의 일로 말한 것이고 선인과 귀신도 뒤에 나오는 단구자의 일과 섬현 진무처에 관한 고사 등을 두고 말한 것이다.

(炎帝食經云 茶茗久服 人有力悅志)
염제식경에 이르기를 차를 오래 복용하면 사람이 힘을 갖고 뜻을 기쁘게 한다.

<소>
*위 구절은 논어 학이편의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원방으로부터 오니 즐겁지 아니한가(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라는 말과 같은 원리다 식경의 기쁠 열悅은 곧 학이편의 기쁘다와 말하다의 뜻이 있는 설說과 같은 뜻으로서 자를 풀면 태심兌心 또는 태언兌言이 되겠는데 여기서는 기쁘다의 뜻이다 태兌 :ㅣㅣ는 팔괘중에 가을인 서쪽을 나타내는 괘로 주역 설괘전에 "태兌에서 기뻐 말한다" 하고 또, "태는 正秋(추분,정직한 가을)다 만물이 기뻐하는 바이다 그래서 태에서 기뻐 말한다고 말한다" 했는데 가을이 되니 만물이 성숙하는 것으로 여기서 배우고 때로 익히니 기쁘지 않는가의 기쁨인 열悅은 그간의 학습을 成功해 몸안에 익숙히 거두어 갖춘 올바른 결실의 말로서의 기쁨이 되기에 특히 열悅이라 표현한 것이리라 차는 가을식물로서 차마시기를 오래고 멀리까지 쌓아가면 이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염제炎帝는 불의 덕이 주제하는 것을 일컬은 것으로 계절로 여름이며 불이 되어 상징색은 붉은색이며 방위는 남방이다 적제赤帝라고도 부르며 농경이 여기 속하게 되어 신농씨 또는 염제신농씨라 합칭해 부르는데 신농식경이란 글은 달리 전하지는 않는 것으로 알며 육우의 차경과 본초강목에 인용제목으로 나오는데 본초강목의 역대제가본초나 인거고금의가서목에 목록이 없는 걸로보아 아마 강목에서는 이전에 인용된 글에서 재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회남자에 일찌기 신농이 온갖풀의 재미滋味를 맛보고 하루에 70독을 만났으며 이로 말미암아 의방醫方이 흥했다 한다 원래 도를 지닌 바 있는 이가 자신의 이름으로는 글을 내어도 세인이 경전의 권위만 알뿐 세상에 펴지는 못하기에 신농 황제등의 이름으로 내게 된 것이라 하니 허위유포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흔히 무슨 경經이라 하며 날조해 내는 것과는 다르다 하겠다 .

醍酉+胡甘露舊傳名 / 제호 감로라는 이름이 예부터 전한다

<소>
*제醍는 청주로서 붉게 색을 이룬 것이고 제호는 본초강목에 보면,
소공이 말하길 제호는 소酉+禾(*젖을 끓인 락酪을 식히면 윗면에 응키는 것) 안에서 나는데 곧 소의 정액精液이다 좋은 소 한석에 서 너되의 제호가 나온다 익혀 저어 제련해서 그릇안에 넣고 응키기 기다려 가운데를 밑에 이르도록 뚫어 진액이 나옴을 취한다.
한보승이 말하길, 일설에 소 안에 있어서 한겨울에도 엉키지 않고 한여름에도 녹지 않는 것이 이것이다.
구종석이 말하길, 락을 만들때 위에 한층 응킨 것이 소가 되고 소 위의 그 유油 같은 것이 제호가 된다 오래 쑤면 곧 나오는데 많이 얻을수 없고 극히 감미甘美하다 쓰는 곳도 적다.
장기가 말하길, 이 물건은 성질이 미끄러워 물건에 채우면 모두 투철한다 오직 계란껍질과 호로에 채워야 나오지 않는다.
*노자에 천지가 서로 합하면 감로가 내린다했는데 이는 상징적 의미에서 한 말이고 감로는 이슬이 달고 기름같이 짙은 것을 말하는데 일통지에는 아주의 몽정산 위에는 늘 이것이 있다하고 일설에는 초목이 갑자기 시들때 성분이 배여 나오게되어 그런 것으로 길상이 아니라고도 하니 이에 따라 병증으로 말한다면 감기나 중풍이 나기전에 갑자기 생땀이 나는 것에 준할수 있겠다.

(王 子尙詣曇齋道人于八公山 道人設茶茗 子尙味之曰 此甘露也.
羅大經약湯詩, 松風檜雨到來初 急引銅甁離竹爐 待得聲聞俱寂後 一區+瓦春雪勝醍酉+胡.)
왕王 자상子尙이 담재도인曇齋道人을 팔공산에서 뵈니 차를 베푸는데 자상이 맛 보고 이는 감로甘露라고 하였다.
나대경羅大經의 약탕시에, 솔바람과 전나무에 비소리로 도래해 끓는 처음에 급히 구리병을 당겨 죽로竹爐에서 떼어서 물끓는 소리가 모두 적적해진 뒤를 기다려 얻은 한잔의 봄눈을 녹인 차는 제호보다 낫다.

<소>
*약은 삼수부에 총 스무획인 끓일약.
*차경에는 출전이 송록宋錄이라하여 신안왕 자란과 예장왕 자상이 팔공산으로 담제도인曇濟道人을 뵈었는데 도인이 차명茶茗을 베풀자 자상이 맛보고 말하길 이는 감로입니다 어찌 차명茶茗이라 말하십니까. 라고 했다고 되어있다 차명茶茗은 쓴차라는 뜻의 고도로 된 판본이 있는데 문맥으로 보아 원래 "어찌 고도라 말하십니까"가 감로와 뜻이 서로 대구가 되어 맞으니 이때 차가 쓴맛에서 단맛으로 나타나는 사례로 보기보다는 이말은 원래 시경의 패풍 곡풍 시에 나오는 "누가 도고(*艸밑余苦,여기서 도는 쓴냉이 뜻은 쓴냉이가 쓰다)라 했나 그 달기가 냉이 같은데" 라는 신세타령하는 구절의 문투를 빌려 또한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 한 말로 보인다 자상과 자란은 모두 위진남북조시기 남조의 송나라(420-479) 효무제 유준의 여덟째와 두째아들로서 나중에 폐제에게 자결의 명을 받았다 팔공산은 회수의 남쪽 안휘성 봉대현의 동남쪽에 있는 산으로 회남자를 짓게 한 한나라 회남왕 유안이 이곳에서 여덟명의 명사를 초빙한데 유래한다.
*나대경(1195~?)은 남송때 사람으로 자는 경륜 그의 글 학림옥로鶴林玉露에 보면 앞의 인용시에 대한 그의 설명도 있으니,
"이남금이 말하길 차경은 어목 용천涌泉 연주連珠로서 다리는 단계로 삼았는데 그러나 근세에 차 다리는 것이 솥에 하는게 드물고 병을 써 물을 끓이니 살펴보기 어렵다 당연히 소리로 일비一沸 이비 삼비의 단계로 삼아야 한다 또 육우의 법은 가루로 차솥에 내니 그래서 제 이비에서 합량合量해 가루를 내린다 만약 지금의 탕으로 찻잔안에서 삶는 것 같은 경우는 당연히 제 이비를 지나고 삼비를 지날 즈음에 합량해 쓴다. 하고는 이에 소리로 판별하는 시를 해 말하길, 섬돌의 벌레 찌륵찌륵 오만 매미 최촉하니 홀연히 천대의 수레가 묶어 실어옴이 있고 솔바람과 산골물소리 듣게 되면 급히 표색 녹자배를 부른다. 하였으니 그 논의는 실로 정미하다 그러나 차 다리는 법이 탕은 여리게 하려하고 늙게 하려하지 않는다 대개 탕이 여리면 차맛이 달고 늙으면 지나치게 쓰다 만약 소리가 솔바람 산골물 같음에 급히 끓이면 어찌 늙어 쓴데서 지나지 않을까 오직 병을 옮겨 불에서 떼고 그 끓기가 그치기 좀 기다린 뒤에 삶으면 그런 뒤에는 탕이 적중하고 차맛은 달다 이는 남금이 강론하지 못한 바이다."
하였다 한편 이에 대해 명의 나름은 차해에서,
"이남금이 두번째 끓기에서 세번째끓기로 넘어가는 지경에 양을 맞춰쓰야 한다고 이른 것은 이는 참으로 감상가의 말인데 나학림은 탕이 늙을까 두려워 솔바람 산골물 소리뒤에 병을 옮겨 불을 제거해서 끓음이 그치기 좀 기다린뒤에 삶는다 했으나 이말은 또한 적중에 들지 못한말로 탕이 이미 늙은 것을 전혀 모르는 것이니 비록 불을 제거해도 어찌 구할것인가"
하였다 어쨌든 위는 모두 말차를 삶는 것을 말한 것이고 뒤의 우려내는 포차에서는 오히려 탕이 펄펄 끓지 않으면 차신이 투철해 나오지 않고 색도 밝지 못하다 한다 차경에서는 아직 나물삶는 유습처럼 뚜껑없는 솥에 차를 다리니 소리보다 기포로 탕보기가 쉬운 것이고 뒤에 병에 다리니 기포를 보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오히려 피리처럼 입좁은 병을 써서 해안 어목 등의 기포를 완상하는 대신에 탕보기 소리로 전차의 운치를 더하게 되었으니 고려의 입좁은 금속병이나 소동파가 야외에서 전별하는데 화로위의 쌍병에서 생笙과 황簧의 소리가 났다는 것이 이것이다.
*차다리는 예를 보면 내린 눈으로 차를 달이는 것을 특히 운치의 일로 여기고 더러는 얼음을 깨어 다리는 일도 있었으니 명나라 하수방의 차동茶董에 이르길,
"학사 도곡陶穀이 당태위와 연고있는 기녀를 사들였는데 눈녹인 물을 취해 단차를 삶고는 기녀에게 이르길 당가는 마땅히 이를 몰랐겠지 하니 기녀가 말하길 저 거친사람이 어찌 이런것이 있음을 알았겠습니까 다만 금박 휘장아래서 얕게 따루고 나저막히 창하며 양고아주羊羔兒酒를 마실뿐이지요하니 도곡이 그 말에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이와 좀 다른 견해도 있어 명의 장원은 차록에서, 눈물은 비록 맑아도 성질이 중음重陰에 감촉되어 사람의 비위를 차게하여 많이 쌓아두는 것은 마땅찮다.했고 해록海錄에는, 육우가 물을 품함에 설수를 제 스무번째로 했으니 전차에 지체되고 너무 냉함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얼음을 녹여 다림 같음에야 더 말할 것이 없을 것이다 한편 수미변水味辨에 보면,
"물을 가리는 것은 그 경중으로 샘물의 고하를 나누니 은두銀斗로 제작해 비교한다 경사京師의 옥천수는 한되에 무게가 한냥이고 새상塞上의 이손수도 무게 한냥이다 제남의 진주샘은 한냥 삼리三釐고 양자의 금산샘은 한냥 삼리로 옥천수보다 이리 혹 삼리 무겁다 혜산과 호포는 각자 옥천보다 사리 무겁다 평산은 육리 무겁다 청량 백사 호인과 서산의 벽운사는 옥천보다 각자 일푼 무겁다 모두 정밀히 헤아려 얻은 결과다 눈물을 거두어 쌓아 삶으면 옥천수보다 됫박에 삼리가 가볍다 무릇 산아래 찬샘은 옥천수보다 가벼운게 없었는데 옛날 육우나 유백추의 의논이 혹 여산의 곡렴수를 제일하고 혹 양자를 제일로하며 혜산수를 제이로 하였으니 경중으로 비교한다면 혜산수는 실로 양자수에 응하니 모두 고인이 억설이 아님을 본다.
승설학인(*추사 김정희)이 서書 함
근래 사람이 반대로 물이 무거운 것을 승한 것으로 여기니 이는 무지망설로 물이 무거움은 이는 물이 니택泥澤으로 인해 깨끗이 다하지 못한 것이다. 아울러 적음"
이라 했으니 명의 전예형은 그의 자천소품의 원천源泉에서 "원천은 반드시 무겁고 샘의 가佳한 것은 더욱 무겁다 여항의 서은옹은 일찌기 내게 말하길 봉황산의 샘은 아노돈의 백화샘에 비해 바로 오전五錢이 못 미친다.했으니 가히 선원仙源의 승勝함을 볼수있다" 라고 하여 샘물이 무거운 것을 비중있게 여기고 있음을 보며 조선에서도 율곡의 설을 따라 맑은물과 흐린물의 무게를 달아보니 맑은물이 더 무거웠다는 얘기가 있어 형이상학을 높이 여기는 듯한 것이 있으나 청의 고증학시기답게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물의 순도가 높아야 차에 좋은 것으로 보면 얼음과 달리 자연 증발수인 눈물이 좋겠으니 혹 증류수를 찻물로 쓰면 어떨까 싶긴한데 빗물은 종래 수취과정상 눈처럼 깨끗하게 거두기 어려웠고 이슬은 받아내기 어려운 등의 사용에 마땅찮은 것이 있어서인지 그다지 즐겨 차다렸다는 말은 없는듯하니 무엇보다 옜사람들은 순도때문보다 차의 냉한 맛에 눈의 결백하고 차가운 이미지를 결부해 눈이나 얼음을 취해 다렸던 것이라 하겠다.

解醒少眠證周聖 / 취한것을 풀고 잠을 적게 함은 주나라 성인이 증거하고,

<소>
*주나라 성인은 문왕의 아들이고 무왕의 동생인 주공 단.

(爾雅, 木+賈苦茶.
廣雅, 荊巴間采葉 其飮醒酒令人少眠.)
이아에, 가木+賈는 고차苦茶다.
광아에,형주와 파주 간에는 잎을 딴다 그 마심이 술깨고 사람으로 하여금 잠을 적게한다.

<소>
*이아는 구체적 작자가 없이 주공이 지은 것이라 전해 내려왔는데 전국시대부터 나오는 것으로 여겨지는 말도 있어 훈고적 내용이 전국시대와서 최종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한다 여기에는 "가木+賈는 고도"라는 말이 나올 뿐인데 진晉의 곽박(276-324)이 주注하기를 "나무의 작기가 치자같고 겨울에 잎을 내며 삶아 국을 해 마실수 있다 지금 일찍 따는 것을 도라 하고 늦게 딴 것을 명茗이라 부른다 일명 천艸밑舛이라 하며 촉인이 고도라 부른다." 하였다.
*굳이 말한다면 茶자가 만들어 지기 전에 쓰인 이아의 석목釋木편에는 고차苦茶가 아니라 고채苦菜(쓴냉이)를 말하는 도艸밑余 자字와 합한 "고도"로 봐야 할 것이다 육우의 차경에서 당개원문자음의에 따라 차茶자로 쓰여진 것을 초의가 옮긴 것이다 중국도 차의 음이 고채의 도(tu)와 차茶(cha)에서 각기 비롯해 보이는 두가지가 있으나 지금의 차자는 육우의 차경과 노동의 칠완시에서 도가 아닌 차로 쓰면서 따로 차나무의 뜻만인 차자로 널리 퍼져 쓰이게 되었지만 도와 차자는 이미 전한지리지나 한서연표등의 한나라 때의 기록에서 부터 차릉茶陵 도릉등으로 혼용되어 쓰이고 있음이 보인다.
*광아는 후한과 수나라 사이인 위진남북조시기 위나라(220-265)의 명제때 박사를 한 장읍張揖이 이아를 보충해 넓힌글 그래서 박아博雅라고도 한다.
*근데 차를 마셔보지만 무었보다 지금 흔히 해 마시는 방식인 우려내는 포차를 두고는 내 경험으로는 커피에 비해 잠을 줄이는 데 있어 내외차나 청차 홍차류를 막론하고 그다지 관계하는 같지 않다 원료로서의 성분분석에는 차가 커피보다 카페인 함량이 높은 것으로 알지만 음료로서 여린 싹을 탕에 우려낸 찻물은 자연히 커피음료보다 함량이 낮다 무었은 어떻다고 일률적으로 말하기 보다 해 마시기 나름인 것이다 또한 차보에서도, 박물지에 이르길 진차를 마시면 사람으로 하여금 잠을 적게한다 한 것은 이는 사실이다 다만 차가 가佳해야 효력있고 또 모름지기 가루차를 마셔야하고 잎을 삶음 같은 것은 효력없다.

脫粟伴菜聞齊영
껍질만 벗기고 데끼지 않은 조밥에 나물 곁들임은 제나라 영에게서 들린다.

<소>
*영은 瓔의 玉 없는 간난애 영으로 춘추시대 제나라의 재상을 한 안영을 말함.

(晏子春秋, 영相齊景公時 食脫粟飯 炙三戈(*익) 五卵 茗菜而已.)
안자춘추에,영이 제나라 경공의 재상을 할때 껍질 벗긴 조밥을 먹고 적 세꼬치와 계란 다섯 차나물 일뿐이다.

<소>
*영은 瓔의 玉 없는 간난애 영,안자춘추는 전국시대 제나라 재상 안영에 대한 글.
*창 과戈는 판본의 오류에 따라 옮겨진 것으로 밑의 한획이 적은 주살 익이 맞음.

虞洪薦犧乞丹邱 毛仙示艸밑聚引秦精.
우홍이 요청하는 단구자에게 향사享祀 드리고 털난 선인은 진정을 이끌어 차떨기를 보였네.

(神異記, 餘姚虞洪 入山采茗 遇一道士牽三靑牛 引洪至瀑布山曰 予 丹邱子也 聞子善具飮 常思見惠 山中有大茗 可相給 祈子他日 有區+瓦犧之餘 乞相遺也 因奠祀後入山 常獲大茗.
宣城人秦精 入武昌山中採茗 遇一毛人長丈餘 引精至山下 示以艸밑聚茗而去 俄而復還 乃探懷中橘 以遺精 精怖 負茗而歸.)
신이기에, 여요땅 우홍이 산에 들어 차를 따다가 한 도사가 푸른소 세마리를 끄는 것을 만났는데 우홍을 인솔해 폭포산에 이르러 말하기를 나는 단구자丹邱子다 자네가 마시는 것을 잘 갖춘다는 것을 듣고 혜택 받아보기를 늘 생각했다 산속에 대명大茗이 있으니 서로 줄수있다 자네가 다른날 음료<*區+瓦犧, 구區+瓦는 잔이고 희犧는 희생용 소를 무늬한 술단지로서 구희로 합칭해 제사에 대한 말로 흔히 쓰인다 예기 곡례편에 남은 음식으로 제사지내지는 않는다 하고 잔을 마신자는 뿌리지 않는다 했는데 여기서는 자신에게 향사를 청하는 입장이므로 스스로 낮춰 말한 것이다>의 남는 것이 있으면 서로 끼쳐주기 바란다 이로 인해 제사하고 입산하니 늘 대명을 획득했다.
선성사람 진정이 무창산 속에 들어가 차를 따다가 한 털사람을 만났는데 길이가 한길남짓이라 진정을 이끌고 산아래에 이르러 떨기차를 보이고 가더니 조금있다가 다시 돌아와 품속의 귤을 더듬어 진정에게 주니 진정이 두려워해 차만 지고 돌아왔다.

<소>
*신이경은 수지隨志에서 한 무제때 사람인 동방삭의 글로 전하는데 한위총서에 이글이 전하며 신이기라고도 했다 그런데 태평어람에서는 신이기는 한나라 사람 왕부의 글이라 하고 지금 따로 이책은 전하지 않으니 근대의 노신은 그의 중국소설사략에서 말하길 류서類書 중에서 신이기라고 출전이 나오는 글은 진晉의 도사 왕부가 지은 것이라 했다 차경의 사지자四之煮 편의 표주박 조목에서도 우홍의 일을 한나라 이후인 진나라 회제때인 영가(307-312) 년간의 일이라 하고 있다 옛글 중에서도 이런 기문류의 글은 더욱 그렇지만 누구 한사람이 일시에 짓거나 편술한 것이 아니고 뒤로 내려오면서 때에 따라 기사가 첨삭 보완되어 편집됐을 가능성이 크다 여요는 지금 절강성 여요현이며 단구는 도은거잡록에 단구자 황산군이 차를 복용하고 경신輕身 환골換骨했다하며 호공식기에 차를 오래복용하면 우화羽化한다는 말이 나오며 초사의 원유편에 "그대로 단구에 우인羽人을 따를사 불사의 마을에 머무르리" 라는 구절이 있으니 단구의 단丹은 광물 주사朱砂의 옛이름 이고 동물에 있어서는 깃털짐승이 되니 곧 남쪽의 붉은 불을 상징하는 것이며 차가 남방의 특산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도홍경의 잡록에 말하길, 차는 몸을 가볍게 하고 뼈를 바꾼다 옛날 단구자 황산군이 복용했다.하고 천태기에 말하길, 단구에 대명이 나는데 복용하면 날개가 생긴다.했다.
*사람이름 진정秦精은 곧 진艸밑秦精으로 수풀의 정精한 것이란 뜻으로 의인화한 것이며 무창武昌은 곧 무갑武甲이 창성하다는 것으로 소가죽처럼 질기며 빽빽한 비늘같은 잎이 둘린 차나무를 갑옷을 입은 모습으로 빗대어 이런 차나무가 무성한 산이라는 말이다 털사람도 산의 수풀을 의인화 한 것으로 키가 한길이 넘었다니 교목의 차나무를 두고 한 말이겠고 귤을 산숲에서 찾아 내었다는 것이지만 차만 가져왔다는 것은 주역 수뢰둔괘의 육삼효에 산지기의 길잡이도 없이 산록으로 나아가 오직 숲속으로 든다 군자 기미가 그만두는 것 같지않다 가면 낭패리.라는 구절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진정은 길잡이를 만나 차를 얻었음에도 또한 귤을 갖는 데는 이르지 못했으니 이는 아직 차가 귤의 덕을 넘어서지 못하고 진상품이 되기에는 자신이 부족함을 말하기도하다 귤처럼 당장 보고 알수도 없고 먹어도 즉효는 커녕 달리 병이 있어 특별히 구하는 것도 아닌데 언듯 쓰서 못먹을 싸구려 풀잎 같은 것을 선약이라고 했다가 감히 사기친다고 덮어쓰거나 거짓의 의도는 아니었더라도 하민이 무엄하게 이런 것을 어디다 들이밀고 방자히 위신을 깍으려 하느냐가 되면 옥을 초왕에게 바치려고 했다가 돌이라고 거듭 발이 잘리는 형벌을 받았던 변화와 같은 꼴을 당하기 쉬운 것이다 위의 차만 지고 돌아 왔다는 부명負茗의 등진다는 뜻의 부負는 한편 승부에서 패배의 부나 기대를 등져서 버린다는 뜻으로도 쓰이는데 곧 예기 곡례편에 나오는 군주의 명을 받들수 없을것 같으면 자신이 나무하다가 몸살난 걱정이 있어 지금 명에 응하지 못한다는 뜻의 겸사 하는 말인 부신지우負薪之憂와 같은 경우로 귤짐까지는 감당하지 못하겠기에 과부하過負荷로 등져버릴 우려가 있다는 뜻이 되겠다 무창은 위진시기 삼국지에 나오는 손권이 무창의 뜻을 기원해 이름 지은 오나라 도읍이다 진정의 일은 차경에서 진의 도연명이 지은 것으로 전하는 속수신기를 출전하며 진무제때의 고사로 나온다.
*폭포산은 절강성 여요현에 있는 산으로 차경에는 폭포천령瀑布泉嶺에서 나는 차는 선명仙茗이라 한다 함.

潛壤不惜謝萬錢 / 흙에 잠긴 것이 만전으로 사례하는 것을 아끼지 않고

(苑, 剡縣陳務妻 少與二子寡居 好飮茶茗 宅中有古塚 每飮輒先祭之 二子曰 古塚何知 徒勞人意 欲堀去之 母禁而止 其夜夢一人云 吾止此三百年餘 卿子常欲見毁 賴相保護 反享佳茗 雖潛壤朽骨 豈忘예桑之報 及曉 於庭中獲錢十萬.)
이원에, 섬현의 진무의 처는 젊어서 두아들과 더불어 과부로 지냈는데 차마시기 좋아하더니 집안에 옛무덤이 있어 매번 마실때 번번히 먼저 제사하니 두 아들이 말하길 옛무덤이 무얼 알관대 헛되이 사람의 뜻을 고달프게하나하고 파내려하니 어미가 금해 그쳤는데 그 밤에 한사람이 꿈에 이르기를 내가 여기 머문지 삼백여년이거늘 댁의 아들이 늘 뜯김을 받게 하려는 것을 힘입어 서로 보호받고 도리어 아름다운 차를 향응받으니 비록 흙에 잠긴 썩은 뼈일 망정 어찌 예상에서 은혜받은 것을 보답한 일을 모르리요 하였다
새벽에 이르니 뜰가운데에서 돈 십만전을 획득했다.

<소>
*예는 醫의 酉대신 羽, 드리울 예.
*이원은 남북조때 남조 송나라의 유경숙이 괴담을 모은 글, 섬현은 절강성 승현의 서남쪽에 있던 고을.
*차경에서는 오랫동안 묻혀 있었던 듯한 헌돈에 꿴 끈만 새것이었다는 글로 보아 누가 돈을 갖다 놓았는가본데 옛무덤은 보통 움실같기 마련인데 젊은과부가 차를 핑계로 밀통장소해서 들락거리며 실제 산사람에게 향응해 자식들이 뜯으려했는가 하기에는 구체적 내용없이 변명할수 없는 고인을 모독할수는 전혀 없는 일이고 엽전葉錢이라고 해서 가랑잎처럼 날아오진 않았을 것이고 뭔가 이무덤에 사연을 두고 애지한 것일 것이다 새돈이었다면 혹 의심 받을 것이다.
*예상은 춘추시대 진의 대부 조순이 뽕나무 밑의 굶주린 사람을 구해준 일로 뒤에 목숨을 보답받게 되었다는 고사.

鼎食獨稱冠六情 / 정식鼎食하는데에도 홀로 육정六情의 으뜸이라 일컫는다

(張孟陽登樓詩, 鼎食隨時進 百和妙具殊 芳茶冠六情 溢味播九區.)
장맹양의 등루시에, 정식지가에서 때에 따라내는 것이 온갖 고루어 묘하게 갖춰 특별해도 꽃다운 차가 육정의 으뜸이니 넘치는 맛이 온누리 퍼진다.

<소>
*장맹양은 위진남북조시기 진晉나라 사람 장재張載로서 용모가 심히 누추해도 박학하고 글을 잘했다하며 무제때 저작랑을 지내고 홍농태수로 거듭옮기고 중서시랑에 이르렀으나 세상이 막 어지러워지자 귀가해 여생을 보냈다 한다 그의 글 장맹양집은 뒤에 명나라 사람이 편집한 것이다.
*정식지가鼎食之家라 해서 벼슬한 귀족세가를 말하고 육정六情은 육청六淸이 장맹양의 시를 옮긴 여러 판본의 오사에 따라 인용된 것이다 주례권4 천관총재치관지직 선부膳夫조에 보면 마시는데는 육청을 쓴다 하고 정사농의 주에 이르길 육청은 물, 미음장漿(짜장따위),예醴(단술) 량酉+京(량凉의 뜻인 장漿의 물로 된 청량음료 같은 것) 의醫(단술과 이酉+也에 고루어 만든 음료) 이酉+也(기장으로 만든 청주)라고 했다 육정은 희 노 애 락 애愛 오惡 여섯 감정.

開皇醫腦傳異事 / 개국황제의 뇌를 치료한 남다른 일로 전하고

<소>
위 내용은 차경에서 수서를 출전으로 나온다.

(隋文帝微時 夢神易其腦骨 自爾 痛 忽遇一僧云 山中茗草可治 帝服之有效 於是 天下始知飮茶)
수나라 문제가 드러나지 않았을때 꿈에 신이 그 뇌골을 바꾸었는데 이로부터 통증이러니 문득 한 중을 만나니 산속에 명茗풀이 다스릴수있다 일러 문제는 복용하니 효과있어 이에 천하가 비로소 차마시기를 알았다.

<소>
*이상 염제식경 이하는 모두 차경의 칠지사七之事편의 내용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동차송에서 인용한 글은 대개 운율과 초록의 간결에 따라 글자가 한 둘 원문과 출입이 있고 또 옮기는 과정에 따라 오자로 보이는 것도 있으니 이점 참고할 것이고 다만 여기서는 대의가 상반되지 않고 전하는 뜻의 별차이가 없으면 일일히 말하지 않는다.

雷笑茸香取次生 / 뇌소차 용향차가 차례로 생겼다.

<소>
*동차송에는 뇌소雷笑로 쓰있는데 나중에 초의의 완당김공제문에는 손수 뇌협雷莢과 설수雪月+臾를 다려 같이 기울였다고 적혔으며 만구지나 운선잡기 등의 원전에는 뇌협으로 되어있다 유배지에서 깊이 역을 연구했던 차산은 각림사 승 지숭의 일화에 나오는 이 경뢰협이란 말에 대해서는 역래로 아무데도 그 의미를 말해주는 바가 없어 경뢰협의 협莢을 모양이 비슷한 자인 소笑의 오자로서 이는 주역 진괘震卦에 우레 혁혁히 오고 웃는 말이 액액한다는 구절의 뜻에서 나온 것으로 본 것인데 후에 초의가 제주도에서 추사와 경뢰협을 다려 같이 기우렸다는 것은 추사가 제주의 유배소에서 초의와 만났을 때 동차송에 대한 의논도 있었고 다시 이에 대해 경뢰협이 의미가 있어 이게 원래 틀리지 않는 것임을 알고 말해 준 것이 또한 초의에게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주역의 점성占性이나 해석이 흔히 그런 점이 있기도 하지만 공교롭게도 두사람은 각자의 처지에 가깝게 해석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주역의 중뢰진괘는 우레가 거듭하는 ::l::l의 상으로 차산으로 말하자면 처음 경상도 장기로 귀양 갔다가 바로 다시 더 큰 죄에 연좌되어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소를 옮긴 것인데 곧 우레에 거듭 놀란 것으로, 경뢰소를 객을 대하는 것이 아닌 지숭 자신이 먹는 것으로 본 것도 또한 자신의 경험과 처세관의 주관에 기인 한 바가 큰 것으로 이는 진괘에서 "두려워해 수신해 살핀다" 하고 "두려움이 복을 이룬다"한 것과 계사전에 "진震하고 허물이 없음은 회悔 함에 있다"하는 등에서 지숭의 의지를 찾아 짚고 또 이는 여러 차서에 나오는, 때를 기다렸다가 우레가 비로소 치면 허둥지둥 서둘러 차 따기 시작하는 일을 이런 류에 결부해 이름해 낸 말로 본 것이다 모문석의 차보에, 몽산의 중간봉우리 차는 늘 춘분전후 인력을 많이 모아 우레가 소리내기를 기다려 손모아 따서 삼일에 그친다.했다 일년을 24절기로 나누니 각 절기마다 보름의 간격이 되는데 입춘에서 우수 경칩 춘분 청명 곡우를 지나 입하까지의 석달 봄에서 신당서 율력지에는 춘분(3월 21일경)에 비로소 우레가 친다하나 이는 대체로 우리 중부기후와 비슷하고 당때 차딴 것은 복건지역의 차가 아닐 것으로 송 휘종의 대관차론에는 건주차는 경칩이 차따는 시후라 하였다.

(唐 覺林寺僧 志崇 製茶三品 驚雷笑 自奉 萱草帶 供佛 紫茸香 待客云.)
당의 각림사 중 지숭이 차 삼품을 제조하니 경뢰소驚雷笑는 스스로 먹고 훤초대萱草帶는 부처에 공양하고 자용향紫茸香은 객을 대한다 이른다.

<소>
훤초대는 시경 위풍의 백혜시에,
백伯은 날세어 나라의 호걸이라
백이 긴창잡고 왕을 위해 앞서 몰아가네
백이 동쪽으로 가고부터 머리는 나부끼는 쑥대같다
어찌 기름발라 머리감지 못하리 만은 누를 맞추러 용모하리
비야 비야 하건만 고고히 해가 나네
백을 생각해 머리아픈 것을 감심甘心하겠거니와
어떻게 훤초(훤추리, 망우초,잊을 훤)를 얻어 뒤곁에 심어야지
백을 생각해 내 마음 고달프게 하네.하였다.
이로보아 훤초대라는 것은 즉 부처를 생각해 주야로 염불하며 마군이를 쫓고 성불하려는 수도의 고뇌를 차로 다르린다는 것이 되겠는데 실제 얼마나 많은 중들이 그렇게 수도에 정진하는지 물을 것도 없이 각자 그릇에 따라 힘닿는대로 하는 것이지만 노력이라도 하는 것과도 다르게 하지도 않으면서 하는듯 팔면 이는 경우가 다른 것으로 어쨌든 가륵한 뜻이다 결국 수문제가 황제의 궁리로 골치아픈 것을 다스렸다는 것이나 젊은 과부가 차다리기 한 것과 맥락이 같은데 나는 선승들의 지금 차선에 대해 모르지만 이는 이때의 차선茶禪의 기본관념과 음용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이해를 말해주는 주요한 단서가 되며 당나라때 조주의 관음사 승 종심이 전조前朝의 일이나 난처 골치아픈 일을 꺼내는자 있으면 바로 번번히 "차 마시고 가라" 한 말로 유명해 조주선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으며 이후 원 청 간의 풍습에도 불청객이 오거나 객이 와서 주인이 응대에 권태롭거나 대화가 불편하게 흐를때 주인이 차를 내겠다는 말을 하면 객이 알아서 돌아가는 불문율 같은 풍습이 있어 이를 지키지 않으면 난처한 국면에 처하는 그런 것이 있었으니 이는 곧 차마신 다는 것은 마음에 고충이 있기 때문이라는 전제가 되었거나 아니면 가지 않으면 곧 지독히 쓴차를 물려 수액을 끼치겠다는 위협이거나 이때의 차내기가 지금처럼 즉석 수월한 것이 아니니 달리 볼일 없이 왔는데 주인으로 하여금 번거롭게 찻자리를 펴게되면 주객간에 서로 마음적으로 부담을 주는 그런 경우 또는 사정이 각박해 단지 빈말로 치례할뿐임을 객이 알고 돌아가야 할 경우나 어차피 객이 가려고 나섬이 정해지고서 역시 빈말로 치례하는 것일 것으로 차마시고 가라는 것도 경우에 따라 바로 말 그대로 "딴소리는 하지말고 왔는데 그냥 가라하기는 미안하니 차나 한잔 마시고 그만 가보게"라는 경우가 될수있어 이런 경우라면 오히려 주인보다 홀대받는 객을 위해 고배苦杯를 들게 해 고충을 달래는 것이 되겠다 하겠고 다음은 객이 아직 돌아갈 생각은 전혀않고 있어서 새삼 차이야기를 계기로 "가라"를 떠올리려는 경우가 있겠고 또는 "차 한잔 드리면 그만 가 주실래요?" 나 아예 이보다 더 심한 경우는 차 "마시고" 갈래? 라고해서 마치 그냥 가지 차 얻어 먹고서야 가겠느냐는 식이 되면 다른기분이야 어찌되던 일단 가지않을 도리가 없는 것인데 한어로 "끽다거"할때 "다茶"나 거去에 억양을 좀 높여 의문사를 만들면 분위기에 따라 이런 뜻도 될것이고 이와 반대로 객이 갈 조짐이 있어 찻자리를 열어 그냥가지 말고 준비하는 거"마시고"가라는 만류의 경우가 있을수 있으니 하여간 지금 세간에 전해 이해 하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점이 있다 하겠다 시경 패풍편의 녹혜시에,
녹색일사 웃도리여
녹색 웃도리에 누런 안감이라
맘의 근심이여 언제 그 그치리
녹색일사 웃도리여
녹색 웃도리에 누런 치마라
마음의 근심이여 언제 그 잊으리
녹색일사 실이여
너가 물들여 다스린 바로다
내 고인을 생각하여
하여금 허물없게 하리
고운갈포 굵은갈포
바람에 서늘도 해라
내 고인을 생각하니
실로 내맘 획獲하네.
하였으니 미망인未亡人이란 말이 여기서 나오는 것으로 미망인 은 곧 미망인未忘人이다 또한 앞서 나온 시경의 패풍 곡풍 시의,
"누가 도고(*艸밑余苦,여기서 도는 쓴냉이 뜻은 쓴냉이가 쓰다.)라 했나 그 달기가 냉이 같은데" 라는 신세타령의 구절에 대해서는 주례에 보면, 쓴냉이(도,艸밑余 즉 茶자)를 관장해 이로 상사에 이바지하니 그 쓴 것을 취함이다.하였으니 여기서 쓴냉이를 말한 것이지 차를 두고 한 것은 아니라 해도 차茶인 "고도"나 여기 "도고"나 비록 재료는 서로 다른 것이라 해도 원 뜻은 다 같이 쓴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특히 쓴냉이가 달리 달콤할 까닭은 없는 것으로 말투로 보아 이 역시 자신의 쓰라린 처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란 것이거나 더우기 그 치료약으로 오히려 달게 여겨진다는 뜻으로 볼때 지금의 차와 뜻이 다를바 없는 것을 알수 있고 또한 훤추리는 본초강목의 일설에 먹으면 바람이 일어 사람이 술에 취한듯 해져 근심을 잊게 되기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시진이나 다른 의가의 견해처럼 그렇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 이를 삶아 나물한 것을 먹은 적이 있었는데 안먹던 것을 먹어선지 몇몇과일과 호박등의 풀열매를 섞어 달인 즙을 마셨을 때 처럼 살살 배탈이 나려는 듯해서 그만 두었을 뿐이다 또한 먹기 위해 훤추리를 구한다고 한 뜻이라면 비록 봄의 나물싹이 아니라 혹 약용으로 다른 시기의 것을 바라서 였다고 하더라도 그리 구하기 까다로운 물건도 아닌데 시에 그냥 때에 따라 채採 하겠다고 하면 그만 일 것인데 굳이 얻어서 뒤곁에 심는다고 할것은 없는 것으로 뒤곁은 옛날 부녀가 거처하는 후원이다 내 경험으로 생각컨데 훤추리는 늦여름에 비오기 전날 노을이 짙듯 주황색 꽃이 피고 뒤이어 장마가 오고 더러 꽃이 한참 필때 오기도 한다 시에는 주역 수괘需卦의 뜻이 있으니 부녀가 후원에서 훤추리 꽃을 완상하며 시름을 달랜다는 뜻이다 또한 아이밴 여자가 이풀을 지니면 아들을 낳는다 해서 의남宜男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운선잡기에는 각림원 지숭이 차를 삼등으로 거두어 경뢰협으로 객을 대하고 훤초대는 스스로 받들며 자용향으로 부처에 이바지하였으니 대개 최상으로 공불하고 최하로 스스로 받든 것이며 객으로서 차의 일로 온자는 모두 기름주머니로 남은 찌끼를 지녀 돌아갔다 했으니 위의 백혜시의 뜻으로 보아도 역시 훤초대가 지숭 자신이 먹은 것이 맞다 또한 당나라에 유학해서 관직도 지낸 신라인 최치원은 그의 당에서 관리생활중에 고국 신라의 집에 보낼차를 사기위해 급료지불을 청해 받은데 감사해 쓴 글인 사신차장謝新茶狀에서, "훤추리를 구하는 것을 면하고 비로소 망우忘憂를 얻었습니다."라고 했으니 이 역시 당시 당나라 사람들의 차를 훤초에 비유하는 보편적 인식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이때 차제조도 이백의 옥천선인장차 처럼 말차덩어리로 제조해 옛날의 조각으로 이어만든 허리띠의 낱조각처럼 납작한 차과를 줄줄이 엮어 띠처럼 포장되었기에 훤초대라 한것일 것이고 경뢰협 역시 옛날 짚으로 계란 싼 꾸러미처럼 경단으로 한 차가 깍지에 든 콩알처럼 포장됐기에 그렇게 불렀을 것이니 즉 이는 이후 송때 단차와 병차에 앞서 그 효시를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자용향은 자순이나 자아紫芽로 만든 차일 것이다.

巨唐尙食羞百珍 沁園唯獨記紫英
큰 당나라가 음식을 숭상하니 진수가 백가지이나 심원에서는 유독 자영紫英을 적었다

<소>
*심원은 후한서 권23의 두융열전 제13에 딸려 나오는 두융의 손자 두헌편에 보면 두헌이 자신의 누이가 장제의 황후가 된 뒤 성세를 믿고 세력을 과시하려는 의도로 명제의 딸인 심수공주의 원전園田을 빼앗았다가 뒤에 장제에게 발각되어 돌려준 일이 나오는데 여기서 공주가 원전을 가진 일이 나옴으로 심원沁園이 곧 공주의 동산을 말하게 되었다 그런데 심수沁水는 또한 계수水+自水라고도 불리며 계는 정약용이 걸명소에서 당나라 승상 이찬황이 육고기를 차로 녹여 차효력을 살펴보는 버릇이 있다고 한 벽계癖水+自의 계로서 계는 고기나 차를 삶고 난 뒤에 건더기를 건지고 난 국물 같은 것을 말하고 또한 계의 음이 물댈 개漑의 뜻으로 원전의 비옥함과 함께 이찬황이나 모두 소유자의 부윤한 생활에서 풍겨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唐 德宗 每賜同昌公主饌 其茶有綠花紫英之號)
당나라 덕종이 매번 동창공주에게 찬을 내릴때 그 차에 녹화綠花와 자영紫英의 호칭이 있었다.

<소>
*윗글은 당나라 소악의 두양잡편 권하에 나오는데 글에는 함통3년(862) 동창공주同昌公主가 하가해서 광화리에 주택했다하고 상이 매번 어찬과 탕물湯物을 내림에 그 차인 즉은 녹화 자영의 호가 있다 등의 말이 있는데 함통년간은 당 덕종(742-805)의 연호가 아니고 의종(860-873)의 연호며 두양잡편은 대종때 부터 의종때까지 열대의 조정에 관한 기사奇事와 이문異聞을 적었는데 흔히 허구가 나타난다 한다 동창공주라는 인물 또한 사료에 확인되지 않고 동창 광화廣化 녹화 자영등의 말로 보아 차가 널리 세속에 함빡 퍼져 감화시키고 녹아 자순이 같이 창연한다는 뜻의 차를 의인화 해서 지은 뜬소리를 들은대로 옮겼거나 차경 칠지사 편에서 양나라 유효작의 글을 실은 중에 차는 찬을 먹는 것과 똑 같으며(茗同食粲)라는 말이 있는 걸로 보아 차는 별식이지만 정찬正餐과 같은 자격으로 더불어 번성한다는 뜻인 같으며 혹은 실제 동창공주라는 인물은 양녀이거나 아마 녹화 자영등의 이름으로 보아 정실의 황후에게서 난 것이 아닌 별자別子인 공주가 있었던 일화에서 비롯해 지어진 말인 것 같다 녹색과 자주는 모두 정색이 아닌 간색의 아름다운 것으로 무늬로 말하면 논어에서 희생용 소에 대해 말한 이른바 얼룩이라는 것인데 정실이거나 친딸이라면 새삼 동同이란 이름을 할것이 없지 않겠나 시경 정풍 치의 시에,
"검은 옷의 어울림이여 낡아지면 내 또 고쳐 해드리리
당신이 관청으로 적適하심이여 돌아오면 내 당신의 찬粲을 드리지"
라는 구절처럼 이 시는 적당한 직위의 임기가 다하면 다시 세습해 주겠다는 식록食祿을 두고 말하는 언지言志로 불리는데 용어로 보아 적자 적실이 내는 정찬을 두고 한 말이며 뒤에 청나라에서도 궁중에서 자기를 쓰던 법을 보면 황태후와 황후만 황유기를 쓸수 있고 귀비는 안은 백자에 밖만 황유고 비자妃子는 보통 황색 바탕에 녹룡무늬고 빈嬪은 남색바탕에 황룡이며 일반 귀인은 녹색바탕에 자주용 무늬를 쓰게 되어있다 사사류기에는 덕종은 차를 즐겼는데 흔히 소酉+禾나 후추를 가미해서 음료했다하는데 특히 이때 차를 식사후 양치나 소화제 겸 찬거리의 한가족 처럼 끼어 넣어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찬粲은 원뜻이 흰쌀로 곧 찬餐 즉 끼니의 성찬의 뜻이며 찬饌은 좀 개별적인 찬으로 간식거리도 포함되어 차를 찬한다의 찬차饌茶등으로도 쓰인다.

法製頭綱從此盛 淸賢名士誇雋永.  
법제한 두강頭綱이 이를따라 성해져 맑은 현사와 명사가 준영雋永을 떠벌렸네.

<소>
*두강頭綱은 본뜻이 맏물차의 포장단위를 말한 것으로서 송나라 웅번의 선화북원공차록에 보면,
"... 오른쪽에 적힌 것은 해마다 십여강으로 나누는데 오직 백차와 승설은 경칩 이전부터 역을 일으켜 열흘만에 이룬다 나는듯한 말을 타고 질주해 중춘이 넘지 않아 이미 경사에 이르니 두강이라 호한다 옥아玉芽 이하는 선후 순서대로 출발해 공납에 충족할 때에 이르면 여름이 반을 지난다"하였으니 강綱은 원래 그물에서 가늘은 실 여러가닥을 거는 보다 굵은 벼리줄인데 역시 송 휘종이 강남의 화문석花紋石을 징발해 배로 실어 나를때 열척을 한 강綱으로 했으며 두頭는 주역 건괘 단사에 "묻 사물이 머리내고 만국이 함녕하다"한 것처럼 수출首出한 맏물이란 뜻으로 쓰였다.
*준雋은 살찐 새고기인데 한나라 괴통이 전국시대 때의 일을 논한 글을 지어 준영이라 했는데 그뜻은 의미가 심장深長하다는 말이다.

(茶經稱茶味雋永)
차경에 차맛의 준영을 일컬었다.

<소>
*차경 오지자五之煮 편에서 준영은 끓인 말차의 제일 윗물인 정영한 것을 말하고 있다.

綵莊龍鳳轉巧麗 費盡萬金成百餠
용봉으로 채색 단장해 교묘히 곱게 바꾸어 만금을 다 써서 백개의 떡을 이루었다

<소>
*단團은 공처럼 둥근꼴의 경단이고 병은 호떡같이 둥글납작한것 보통 용단과 봉병으로 만들었다 송나라 웅번의 선화북원공차록에 보면 태평흥국(976-983)초 그러니까 976년경 처음 만들기 시작했다 하는데 축목의 사문류취속편에 북원차는 태평흥국 삼년에 시작되었다고 하고 건안지에는 흥국2년에 용배龍焙를 두고 용봉차를 만들었다는 조운사 가적의 기록이 있으니 아마 흥국2년(977) 겨울전에 설치하고 다음해 초봄부터 차따 만든것이 아닌가 한다 용봉차는 찻가루를 덩어리한 것에 용봉의 무늬를 찍어 궁중에 진상하던 상품말차로서 명나라초 홍무24년(1391) 부터 진상이 금지되고 엽차인 차아茶芽로 고쳐 올리게 하고부터는 차츰 외국에 까지 탕에 우리는 포차식 엽차가 유행하고 말차는 보기 어렵게 되어졌다.

(大小龍鳳團 始於丁謂 成於蔡君謨 以香藥合而成餠 餠上飾以龍鳳紋 供御者 以金莊成.
東坡詩, 紫金百餠費萬錢)
크고 작은 용봉단은 정위가 시작해서 채군모에게서 이루어지고 향약으로 합해 떡을 만들어 떡위에 용봉의 무늬를 꾸몄는데 어용에 바치는 것은 금분金粉으로 단장해 이루었다.
소동파의 시에, 자금색 떡 백개에 만전이 쓰인다.

<소>
*정위丁謂(966-1037)는 송나라 소주사람으로 자는 위지 또는 공언 도관을 일으키고 거듭 상서로운 물건을 올려 총애를 구하고 재상이 되어 환관과 결탁해 정권을 전단하고 진국공에 봉해 졌으나 인종 즉위후 지방관으로 폄직되었다가 뒤에 비서감을 지냈다 사고전서본의 선화북원공차록의 주에는 사람들이 용봉단은 정위가 만든 것으로 흔히 알고 장씨의 화만록에도 그렇게 실렸는데 실은 정위가 민땅에 조운사를 맡을때 비로소 그의 차록에 실은 것이라 한다.
*채군모(1012-1067)는 차록을 지은 송의 채양으로 군모는 그의 자字 시호는 충혜 지금 복건성 선유현 사람으로 귀전록과 승수연담록에 의하면 한근에 여덟떡짜리를 정품을 취해 스무떡에 한근짜리 소용단을 만들었다 한다 용봉단이 자금색인 것은 채색으로 그런 것이 아니고 하룻밤 배화불을 보아 말리면 그런 색이 이뤄진다 한다.
*소동파(1037-1101)는 송의 미주 미산인으로 아버지 소순 동생 소철과 함께 삼소라 불리며 모두 당송팔대가의 한사람들로 이름은 식, 동파는 그의 호 그의 글은 왕양자사汪洋恣肆 휘주창달揮酒暢達하여 마치 이전의 당나라때 두보의 천착해 다듬는 시풍과 상대적으로 천의무봉한 이백의 시풍처럼 후에 글짓는 이라면 노래가 곧 시작詩作이 되는 만큼 으례 음주가무의 흥이 따르기 마련 이라는 식의 표본이 되었으며 시 또한 웅방청신雄放淸新했는데 이런 도가의 경향성이 있는 문풍은 중국만 풍미했을뿐 아니라 고려의 문원文苑도 그의 문풍에 많이 영향을 받음을 당시 고려문인의 행태와 한림별곡 같은데서 쉽게 볼수있다 그는 자신의 촉당과 상대적인 낙당을 중심으로 비롯하기 시작하는 성리학설에 대해 일유日諭등의 글에서 부정적 입장을 보였는데 초기에 위학僞學으로도 몰렸던 성리학이 후에 결국 남송 원 명에 이르기 까지 국학으로 공인돼 도교나 불교를 내치고 오로지 나설뿐 아니라 사부詞賦나 일삼는 것은 것은 도학자의 할 바가 아닌 것으로 구별되면서 주렴계와 소강절 정이 정호 두 정씨나 주자등의 성리학자 외에 자연 그에 대한 언급도 무대밖으로 내 몰리다시피했으나 만주족의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이전까지의 한족의 학문적 경향에 대해 비판성을 띠고 고증학등이 일며 체계적으로 성리학을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자연 그에 대한 새로운 등장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문원의 세습귀족문신적 왕양호방한 문풍과 달리 조선중기 이후 성리학풍의 삼가고 성실히 천착하는 도학자적 수신이 요구되고 학풍 역시 산림처사나 과거출신의 지방사대부적 인물경향이 크게 작용해 이끌어 나가게 되었으며 더우기 퇴계가 도산십이곡발에서 우리 동방가곡은 대저 음탕 왁자함이 많아 말하기 부족한데 한림별곡같은 류는 문인의 입에서 나왔으나 긍호방탕矜豪放蕩 한데다 설만희압褻漫戱狎을 겸해 더욱 군자의 마땅할 바가 아니다라고 비판하는 등으로 위의 고려문원풍인 한림별곡류의 경기체가가 종언을 고하게 되다시피하고 또한 퇴계처럼 주자의 무이곡 형식을 따라 대신하게 되었던 것인데 조선후기에 와서 조선에서도 북학파에 따라 성리학이 비판되기 시작하고 실학이 등장하면서 역시 이글에서도 성리학과 관련되어 나온듯한 언급이 없는 만큼이나 반비례해 거듭 소동파에 관한 말이나 그와 관련된 인물등에 대한 내용이 등장하는 것 등은 위의 사정과 감안해 볼때 일찌기 추사가 동파에 대해 보인 존숭등과 결부해 생각해 볼수 있다 위 소동파의 시구는 그의 화장기기차和蔣夔寄茶 시에 있다.

誰知自饒眞色香 一經點染失眞性
누가 알리 스스로 참향과 참색이 넉넉한데 한번 찍어 물들면 참된 성을 잃음을

<소>
차마시기가 약으로서의 효용보다 일상의 기호품으로 되어 가면서 맛도 쓴데서 달고 향나는 쪽으로 변해 왔지만 송나라 채양의 차록에 보면 이무렵에야 본격적으로 상등품의 차로서 오히려 다른 고급향료나 조미제를 더하지 않고 차만 음료하는 것을 더 높이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채양의 차록의 향 조목에 보면,
"차는 진향眞香이 있는데 공납에 들이는 자는 미미히 용뇌를 고膏에 섞어 그 향을 도우려 하는데 건안의 민간에 시차試茶는 모두 향을 넣지 않는다 그 참을 뺏을까 함이다 삶아 점차點茶할때 또 진과珍果와 향초를 섞을것 같으면 그 뺏음이 더욱 심하니 쓰지 않음이 정당하다"
차는 흡착성이 있어 송때의 가요기 잔의 균열진 유층 안으로 갈색찻물이 드는 것이 미관으로 이용되고 기름접시 같은 그릇을 차로 풀어 씻는 세제로 이용되기도 하였는데 이 흡착성 강할수록 차의 효용이 강한 것으로도 볼수 있겠지만 한편 차에 있어 마시고 난 찻물 자국이 잔에 잘 붙어 남는 것을 좋은 차로서는 마땅치 않게 여기는 경우도 있었다 이 차의 강한 흡착성 때문에 마치 장자 응제왕편에 나오는 혼돈처럼 상대적으로 다른 외물로 부터의 오염 받음이 쉬워 보관에 있어서 차의 순수를 지키는 어려움도 적지 않다 비록 채양이 아니라도 이 스스로의 아름다운 천진이 넉넉함을 알아줄 사람은 천자문에서 묵비사염이라 말한 것처럼 순수한 실이 외계의 영향에 따라 물드는 것을 보고 슬퍼했다는 묵자와 같은 사람이나 백옥은 새기지 않고 단주에는 덧칠하지 않음을 아는 자 라야 할것이다.

(萬寶全書, 茶自有眞香 眞味 眞色 一經他物點染 便失其眞.)
만보전서에, 차는 스스로 참향과 참맛 참색이 있는데 한번 다른 물건에 찍어 물들리면 쉬이 그 참을 잃는다.)

<소>
*만보전서에 대해서는 아직 확인해 보지 못했고 다만 명나라 만력 천계년간에 문회당장서를 구성해 가게를 열고 고서적을 유통한 명의 전당사람 호문환胡文煥이 편집한 격치총서에 차집茶集 한권이 들어 있는데 격치총서는 사고전서의 존목에서 말하길 만력 천계년간에 점포의 판매이익용으로 낸 것이라 하였는데 일본의 포목조풍이 "백가명서"를 편집해 내면서 호문환이 편집한 차집을 신각차집新刻茶集으로 수록하였으니 그 앞에 만력계사년(1593)의 서문이 있어 차집은 이해 이전에 엮어진 것으로 보이며 이 차집에 명나라 장원의 차록이 제목이 바뀌어 채록되고 만보전서는 호문환의 격치총서가 뒤에 재발간 되면서 상업적으로 제목만 바뀌어 판매되다시피 한것이거나 역시 격치총서에서 글을 뽑아 후에 매출용으로 간행된 책이 아닌가 한다.

道人雅欲全其嘉 曾向蒙頂手栽那 養得五斤獻君王 吉祥예與聖楊花
도인이 평소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하려고 일찌기 몽산의 정상 향해 손수 그것을 심었네 다섯근을 길러 얻어 군왕에게 바치니 길상예와 성양화聖楊花로다

<소>
*예는 艸밑에 止가 셋 합자한 것 꽃술 예.
*성양화聖楊花는 도곡의 청이록에는 성사화聖賜花로 되어 있음.

(傅大士 自住蒙頂結庵 種茶凡三年 得絶嘉者 號聖楊花吉祥예 五斤 持歸供獻.)
부대사傅大士가 스스로 몽정산에 암자를 짓고 머물러 차를 심은지 무릇 삼년에 극히 아름다운 차를 얻어 성양화 길상예라 호하고 다섯근을 지녀가 공헌했다.

<소>
*예는 艸밑에 止가 셋 합자한 것 꽃술 예.
*부대사(497-569)는 자가 현풍이며 남북조때 남조(420-589년의 약 169년 동안 송,제,양,진 네 나라가 중국 이남에서 교대했던 시기)사람인데 오대에서 송초에 걸친 사람인 도곡陶穀(903-971)의 글인 청이록의 성사화聖賜花 조목에 보면, 오땅의 중 범천이 정수리를 태워 서원하고 쌍림의 부대사에게 공양을 위해 스스로 몽정산에 가서 암자를 맺고 차를 심어 무릇 삼년에 맛이 막 온전히 아름다울수 있었다 절가絶佳한 것으로 성사화 길상예 모두 다섯근을 넘지 않는 것을 얻어 지녀 돌아와 공헌했다.라고 되어있다 이것이 후에 명나라 때의 글에서 성사화가 성양화聖陽花로 나오고 범천 대신에 부대사가 지녀가 공헌한 것으로 나오며 성양화聖楊花라는 인용표기는 명나라 육수성의 차료기중에 도곡의 명천내용을 부록해낸 판본에서와 청나라 육정찬의 속차경에서 보인다.

雪花雲月+臾爭芳烈 雙井日注喧江浙
설화차 운수차가 꽃다운 열렬을 다투고 쌍정차 일주차는 강소 절강지방에 떠들석하다

(東坡詩, 雪花雨脚何足道.
山谷詩, 我家江南採雲月+臾.
東坡至僧院 僧梵英葺治堂宇嚴潔 茗飮芳烈 問此新茶耶 英曰 茶性 新舊交 則香味復.
草茶成兩浙 而兩浙之茶品 日注爲第一 自景祐以來 洪州 雙井白芽漸盛 近世製作尤精 其品遠出日注之上 遂爲草茶第一.)
소동파의 시에, 설화雪花와 우각雨脚을 어찌 족히 말하랴.
황산곡黃山谷의 시에, 나의 집이 강남江南에 있어 운수雲月+臾를 땄다고 하였다.
소동파가 절에 이르니 중 범영梵英이 지붕을 이어 아주 깨끗이 수리하고 차를 마시는 데 향기가 열렬해 새로 딴 차냐고 물으니 범영이 말하기를 차의 성질이 새것과 옛것이 교차하면 차의 맛과 향기가 중복한다 하였다.
초차草茶는 양절兩浙에서 이루는데 양절兩浙의 차 품질은 일주日注가 제일이다 경우景祐<*송 인종의 연호로 1034-1038> 이래로 홍주洪州의 쌍정백아雙井白芽가 점차 성하더니 근세에는 차의 제작이 더욱 정밀해져서 그 품이 일주日注차의 위로 멀리나와 드디어 초차草茶 중에서 제일이다.

<소>
*산뜻하게 새집을 지어도 고택에서 우러나는 풍미를 갖출수는 없다 한편 헌집은 흔히 후락하고 시대에 떨어져 살기에 불편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고택의 품미를 지니면서 주거에도 맞게하는 것이 묘가 될 것인데 이는 쉽지 않은 일로 도리어 반대로 되거나 이도저도 아니게 되기 쉽다 흔히 수리하느니 새로 짓는게 낫다는 것은 단지 경비만의 문제를 따져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소문충집에,
"내가 황주로 떠난지 십칠년에 다시(復) 팽성의 장성도와 단양의 진보지와 같이 사원에 오니 중 범영이 지붕을 이어 다스려 옛에 비해 엄결을 더하고 차마심이 방렬芳冽하였다 내가 이는 새차인가 물으니 범영이 차의 성질은 신新과 구舊가 교交하면 향과 맛이 복復한다 말했다 내가 일찌기 거문고를 아는자가 말하는 것을 보았는데 거문고가 백년이 안되면 오동의 살은 뜻이 다 가시지 않아 느슨하고 급하며 맑고 탁함이 늘 비오고 빛나며 춥고 더움과 서로 응한다 하였는데 이 이치는 차와 서로 가깝다 그래서 아울러 적는다."
초가지붕은 해마다 갈고 새로 덮는게 아니고 묵은 이엉위에 새이엉을 다시 덮는다 위의 설화 우각이란 말은 전안도가 건주차를 부쳐준데 대해 소동파가 화답한 화전안도기혜건차和錢安道寄惠建茶 시에 나오는데 여기서 소동파는 당시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하는 쌍정차와 일주차에 대해 일주를 노예하고 쌍정을 신하한다해서 건차를 절대우위로 하고있다 그런데 초의는 왜 위 설화 운수등의 시구에 대해 동파와 범영에 관한 고사로 주를 달았는지 위 주로 보아서는 분명히 나타내고 있지 않은데 아마 자신의 생각이나 차산에게 들은 말의 뜻이 분명히 단언할수 없기에 은근히 몇가지 경우를 제시한 것이 아닐까한다 문맥으로보나 뭘로 보나 꽃향기차 처럼 건주 교목차와 강남 초차를 섞어 먹진 않았을 것이고 마치 담배나 아편을 완전히 끊지 않아서 다시 맛을 보게 되는 것과 같은 경우나 옛사람과 헤어지게 된후 영 잊지 않아 다시 만나니 새삼 감회가 더하다는 인간 기본정서에 비유해 말한다면 즉 첫째로 전에 먹어본 사람은 역시 건차가 나음을 알뿐아니라 새삼 더하다는 것이고 둘째로 생각할수 있는 것은 당시 묵은차와 새차를 섞어 음료하는 방법이 유행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과 또 하나 혹 가루를 탕에 풀어 단번에 그냥 휘 젓는 것보다 송휘종의 대관차론에서 점차를 일곱차례로 나누어 거듭하는 것처럼 몇차례 가수해서 말차를 개면 설화와 향미가 더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볼수도 있겠다 소동파의 일화는 주역 복復괘에 의미를 두고 나온 말인데 복復은 있던데서 다시니까 중복해 더한다는 뜻이 있다 설화는 흰말차가 탕에서 흰좁쌀같은 기포꽃이 피는 것을 말하고 우각은 탕에 쌓인 젖꽃이 차츰 녹아 빗발처럼 듣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차경의 오지자 편에,
말沫과 발은 탕의 화華이다 화의 박한 것을 말이라 하고 두터운 것을 발이라 하며 가볍고 잘은 것을 화花라 하니 대추꽃이 둥근 못위에 표표연히 뜬것 같고 또 휘도는 못과 굽은 물가에 개구리 밥이 비로소 난것같고 또 맑은 하늘의 시원명랑함에 뜬구름이 비늘같음이다 그 거품이란 것은 녹전綠錢이 물가에 뜬것 같고 또 국화꽃이 술단지와 도마안에 떨어진 것 같으며 발이란 것은 찌끼로 다려 끓음에 이르면 거듭된 탕화湯華가 거품을 쌓아 파파연히 허옇게 적설을 쌓은 것 같으니 천부艸밑舛賦에서 소위 "환하기가 적설 같고 빛나기가 봄꽃모양 같다" 한 것이 있다.
했으니 설화는 두꺼운 거품꽃이 되겠다.
또한 모문석의 차보에,
"원주의 계교界橋 차는 그 이름이 심히 드러났는데 호주의 연고와 자순이 삶으면 녹각綠脚이 아래로 드리움만 같지 않다 호공숙의 부에 구름이 녹각을 드리운다(운수녹각雲垂綠脚) 일렀다"
라고 했으며 채양의 차록에는 차가 적고 탕이 많으면 운각산雲脚散하고 탕이 적고 차가 많으면 죽면으로 모인다 했으니 운각산은 찻가루를 탕에 갤때 이는 거품인 젖꽃발이 퍼져 꺼지는 것을 말하고 운수雲月+臾는 황정견이 쌍정차로 소식에게 보내던 시인 이쌍정차송자첨以雙井茶送子瞻 시에 한 말로 역시 운각의 영양진 것이라는 뜻이 되겠다
*위 초차에 관한 내용은 역시 소식 황정견 등과 같은 시기의 선배인 송 구양수의 귀전록에서 나온 것인데 이구절을 그대로 옮기면,
"납차臘茶는 검남과 건주에서 나고 초차는 양절(*절서와 절동으로 지금 절강성)지방에 성하다 양절의 제품이 일주가 제일 되는데 경우(*1034-1038)이후 부터는 홍주의 쌍정백아가 점차 성해서 근세에 제작이 더욱 정精하다 홍사깁 주머니에 불과 한두냥해서 보통차 십 몇근으로 길러 덥고 습한 기를 피하니 그 품이 일주 위로 멀리 나와 드디어 초차의 제일이 된다.했으니 역시 상차常茶와 정차精茶를 보관에 중복시킨 것으로 왕씨담록에, 공이 말하길 차품이 높으면서 년월이 많은 것은 반드시 좀 묵어 낡는다 우연히 차있는 곳이 있어 초봄에 새싹을 취해 가볍게 구워 섞어 삶으면 기미가 스스로 돌아와 있다 양양襄陽의 시험해 만든 것이 심히 가佳해서 일찌기 채군모에게 말하니 또한 그렇게 여겼다.
*일주日注는 일주日鑄로도 쓰며 절강성 소흥의 지명, 쌍정은 강서성 남창의 지명.
*황산곡(1045-1105)은 송의 강서출신인 황정견으로 자는 노직 산곡은 그의 호.

建陽丹山碧水鄕 品製特尊雲澗月
건양의 단산에 벽옥물 흐르는 동네에서 품제한 것이 특히 운간월을 높인다.

<소>
*운간월은 그이름으로 보아 달떡모양의 말차 덩어리로 운감월과 월간월을 말할것임.

(遯齋閑覽, 建安茶 爲天下第一 孫樵送茶焦刑部曰 晩甘후十五人 遣侍齋閣 此徒乘雷而摘 拜水而和 盖建陽丹山 碧水之鄕 月澗雲龕之品 愼勿賤用. 晩甘후 茶名.
茶山先生乞茗疏, 朝華始起 浮雲효효於晴天 午睡初醒 明月離離於碧澗.)
둔재한람에, 건안차가 천하제일이 된다 손초孫樵가 차를 초형부에게 보내며 말하기를 만감후 열다섯 사람을 시재각侍齋閣에 보내니 이 무리들은 우레를 틈타 따서 물에 절해 고루었으니 대개 건양建陽의 단산丹山과 벽수碧水 마을의 월간月澗과 운감차의 품은 삼가서 천하게 쓰지 않는다.하였다 만감후는 차의 이름이다.
차산 정약용선생의 걸명소乞茗疏에,
"아침햇살에 비로소 일어나니 뜬구름이 맑은 하늘에 희디희고 낮잠에서 처음 깨임에 밝은 달이 푸른 산골물에 저만치 떠있다")

<소>
*후는 후候의 人없는 원래 글자로 여기서 뜻은 후候를 보는 사람으로 곧 제후의 후侯 임.
*효효의 효는 세개의 白이 합한 글자로 밝을 효.
*둔재한람은 북송 범정민의 글, 손초는 당나라 한유의 문인.
*만감후는 좋은 차를 마신 뒷맛이 달콤해지는 것을 의인화해 말한 것이고 우레를 틈타 딴다는 것은 우레치는 때가 오면 차따기를 시작한 경뇌차라는 것을 두고 말한 것이고 물에 절해 고룬다는 것은 모문석의 차보에 보면 호주 장흥현 고저산 탁목령의 금사천은 바로 해마다 차만드는 곳으로 호주와 상주 두군이 접경해 장차 차를 만들때 두군의 태수가 거동을 갖추어 와서 칙명에 절해 금사샘에 제사하고 그 물로 제조한다는 말이 있음.
*차산선생(1762-1836)은 정약용으로 차산은 그의 호중에 순조1년인 1801년에 일어난 신유사옥에 관련되어 그가 18년간 전남 강진에 귀양살던 곳의 산이름에서 딴것으로 정약용은 불우히 차산에 머물렀지만 이로 정약용을 만남으로 가회를 이루었다 할 차는 지금 흔히 동백이라 부르는 산차山茶다 걸명소는 유배시시기인 을축년(1805)에 지은 글로서 뜬구름이 갠 하늘에 효효하다(浮雲효효於晴天)함은 차경의 오지자五之煮 편에 "또 맑은 하늘의 시원 명랑함에 뜬구름이 있는거와 같아서...(又晴天爽朗 有浮雲)"라는 구절이 있으며 효효도 곧 이 편의 파파연(白+番 흴파)의 파파와 같은 말이다 리리離離는 순자 비십이자편에 "사업에 노고하는데서는 려려연 리리연離離然 한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걸릴리의 뜻이 아니고 거리해 떨어져 있는 모습이다 즉 위 걸명소에서 인용한 두구절은 모두 아침에 일어나서 말차를 저어 마심에 찻물에 흰꽃이 구름처럼 일어나는 운감차로서의 모습과 저녁에 깨어서 푸른찻물에 달같은 기포가 뜬 월간차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기도하다 즉 초의가 운감 월간에 대한 주註로 차산의 백운과 명월에 관한 글을 달은 것은 운감과 월간이 바로 백운과 명월이 라는 것을 분명히 들어 알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감龕은 지금 흔히 탑안의 공간 같은 감실의 뜻으로 주로 쓰이고 있지만 감龕은 글자의 구성이 용龍이 합合한 것으로 설문에도 감은 용의 모습이라하고 순洵은 소용돌이 안의 물이다 하고 이아의 석언 편에는 순洵은 감이라 했으며 또한 석수釋水 편에서는 소용돌이는 순이 된다 했으니 곧 운감차는 바로 찻잔에 차를 격불해 저을때 이는 소용돌이 위의 흰구름의 거품을 말한 차인 것이고 월간月澗은 산골물도랑의 달로서 송 휘종의 대관차론의 점차편에서 한잔의 말차를 개어젓는 총 일곱차의 순서중에 제 일차로 개는 것을 말할때 드문별과 밝은 달이 일어난다 했으니 여기 달은 바로 잔안에 새알을 깨어 놓았을때 노른자처럼 벅벅한 말차에 드물게 뜨는 큰 기포를 말하는 것이며 명월 벽간도 모문석의 차보에 협주에 나는 차이름으로 나오니 당국사보에는 협주에 벽간 명월 방예 수유료등이 있다 했다.

東國所産元相同 色香氣味論一功 陸安之味蒙山藥 古人高判兼兩宗
우리나라에서 나는 차는 원래 같은 것으로 색과 향 기氣와 맛의 공이 같음을 논하고
육안차의 맛과 몽산차의 약을 옛사람의 고견으로 둘을 겸했다 판정했다.

<소>
*육안陸安은 六安으로도 쓰며 육안차는 중국 안휘성 곽산현 서쪽 십여키로에 있는 육안산에 나는 차로서 명나라 도융의 고반여사에서는 육안차가 약에 넣으면 가장 효과가 있다하고 재료로서 차는 좋은데 제법이 부족해서 맛은 좀 쓰서 부족한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조선의 허준은 동의보감에서 육안차는 맛으로서 이름을 얻은 것이라 하고 또한 청나라 강희 14년(1675)에 출판된 유원장의 차사에는 차는 새것을 귀히 여기는데 육안차는 극히 묵은 것을 아름답게 여긴다하고 육안의 매화편이 제일되어 여러차의 으뜸이며 근일 도씨 성의 사람이 제법이 더욱 정精해 도차라 이름하는데 원근에서 다투어 가진다 했다 이로써 일단 말대로 만 본다면 정약용이 말한 육안차의 맛은 지금 볶거나 쪄도 취색을 살려 만든 녹차와는 좀 다를 것으로 보이며 다만 이때 중국에서는 주로 포차식으로 음료했을 것이지만 역시 조선말엽에 전하던 편단차 계통의 엽전차 맛이 보다 여기에 가까울 것으로 생각된다.
*몽산은 지금 사천성인 촉의 아주에 있는 다섯봉우리의 산을 말하는데 오대시기 촉국의 신하 모문석의 차보에는 이곳의 차가 성질이 차지 않고 따뜻해서 오래된 냉병을 고쳤다는 사례가 실려있다 차가 성질이 차지 않고 따뜻하다는 경우에는 다른 품종이 있다기 보다는 대개 홍차류임을 말하는 것이 되는 것 같다 일단 발효성의 차는 게우게되는 일이 잘 없는 같고 특히 우리기가 지체되어 맛이 쓰거나 해서 중간에 미처 새로 끓이지 못한 찬물을 보태 맛을 조절하려 하거나 타지 않게 하려고 설 볶거나 쪄서 풋나거나 떫은차에 우린것이 식어서이기 보다도 원래 미지근한 물에 우려 마시고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마신 분위기도 비리고 언잖아 소화에 마땅찮으면 정확히 게우게 되는 같다 차의 성질이 냉하니 여름에 차게 해 마시면 효과가 배가倍加 될것 같지만 실제는 그게 아니라 입주위의 온도만 다소 내려갈 뿐 더운차를 마셔 바로 기공으로 열이 발산하며 전체적 체온하강이 일어나는 것만 못하다 하며 또한 차게 마시면 차의 떫은맛이 담이 엉키듯 엉키는지 찬밥을 먹는 것처럼 소화에 유리하지 못한 것 같아 특히 짙은 냉녹차로는 다소 부적합 한 것 같다 고인은 정약용을 두고 말한 것이겠다. 

(東茶記云 或疑東茶之效 不及越産 以余觀之 色香氣味 少無差異 茶書云 陸安茶 以味勝 蒙山茶 以藥勝 東茶 盖兼之矣 若有李贊皇陸子羽 其人必以余言爲然也.)
동차기東茶記<*정약용의 글로 지금 전하지 않음>에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차의 효용이 월주의 차보다 못하지 않나 의심하는 사람이 있지만 내가 보건대 색과 향기와 기와 맛이 조금도 차이가 없다 차서茶書에 이르기를 육안의 차는 맛으로 낫고 몽산蒙山의 차는 약으로서 낫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의 차는 대체로 겸했다 만일 이찬황이나 육우가 있다면 그 사람들이 반드시 내 말로서 그렇다고 하리라.

<소>
1)이찬황(787-850)은 조군 찬황사람으로 당의 재상을 지낸 이덕유李德裕로서 찬황공이라고도 불렀다 자는 문요文饒 길보자吉甫子라고 하며 당 무종때도 재상을 지내며 지방세력을 깍고 황권을 높이는데 극력하였다 그는 수체水遞를 해서 멀리 혜산샘물을 길어 먹었으며 차에 감식안이 높아 물맛을 가려내고 차즙을 육식에 부어 시험해 본 일화가 전한다.
사문류취에, 찬황공 이덕유가 묘당에 지낼때 친지로서 서울에서 사명을 받드는 자 있어 공이 말하길 돌아오는날 금산아래 양자강의 남령수를 더불어 한병 취해 오기를, 하니 그사람이 공경히 허락했다 사명에 돌아와 배를 타던 날 취함으로 인해 잊어 버리고 배를 띄워 석성 아래 이르자 막 생각나서 이에 강속에서 한병 뜨서 서울에 돌아와 바쳤다 공이 마신뒤 비상히 탄식 의아해하며 말하길, 강의 겉물 맛이 종전의 해와 다른 것이 있구나 이 물은 자못 건업의 석두성 아래 물과 비슷하구나.그사람이 바로 사과하고 감히 숨기지 못했다.
옥천자에, 예전에 어떤사람이 서주목에 제수되었는데 이덕유가 일러 말하길 그 군에 이르는날 천주봉 차를 삼각만 주기 바란다하니 그 사람이 수십근을 바치니 이덕유는 받지않고 물려 돌리었다 다음해 군직을 파하면서 의도해 정품을 몇각 구해 주니 덕유가 열람해 받고는 이 차는 가히 술과 먹이의 독을 풀수있다 하고는 이에 한잔 삶기를 명하고는 육식에 붓고 은합으로 닫아 그 다음날 인해서 보니 그 육식이 이미 물로 화해 뭇사람이 그의 넓은 식견에 감복했다.
2)육우(약733-약804)는 전차박사煎茶博士로 불리며 차경을 지은 당의 복주(지금 호북성 천문현)사람으로 자는 홍점이고 자칭 상저옹이라 호하고 또 다른 호로는 동강자라 하며 안진경등의 명류와 여시인 이계란 중 교연과 자못 우호가 있었다 일명 질疾이라는 이름과 계자季疵라는 자는 그가 호주자사 이계경에게 수모를 받고 지은 것이라 한다. 

還童振枯神驗速 八 顔如夭桃紅
동자로 돌아오고 마른가지가 떨치는 신통한 효험이 빨라 팔순노인의 얼굴이 싱싱한 도홍색이라

(李白云 玉泉眞公 年八十 顔色如桃李 此茗香淸 異于他 所以能還童振枯 而令人長壽也.)
이백이 이르기를 옥천사玉泉寺의 진공眞公이 나이 팔십에 안색이 복숭아 오얏 같다 이 차의 향 맑음이 딴 곳과 다르기에 동안으로 돌리고 시든 것을 떨치며 사람으로 하여금 장수하게 하는 것이다.

<소>
1)당의 이백이 족질승 중부가 옥천의 선인장차를 드린데 답한 시의 서문을 보면,
"내 듣기를 형주의 옥천사 근방 청계 여러산의 산동굴에 왕왕 유굴乳窟이 있어 굴 가운데 흔히 옥천이 교류하고 이 가운데 흰 박쥐가 있어 크기가 까마귀 만하다 한다 선경仙經을 감안하면 박쥐는 일명 선서仙鼠이니 천년뒤에는 몸이 눈 같으며 서식은 꺼꾸로 매달린다한다 대개 유수乳水를 마시고 장생함이리라 그 물가 곳곳에 차풀이 있어 벌려 나는데 가지와 잎이 벽옥같고 오직 옥천사 진공이 늘 따서 마셔 년 80여세에 안색이 복숭꽃같고 이 차의 맑은 향으로 미끄럽게 익음이 다른것과 달라 능히 동안으로 돌리고 시든것을 떨치며 사람의 수명을 부지하는 소이다 내가 금릉에 놀면서 종족승 중부를 보니 중부가 내게 차 수십조각을 보이니 주먹같이 중첩해 그 꼴이 손과 같아 옛으로 널리 보아도 볼수없는 것이니 인해서 지녀 보이고 주면서 겸해 시를 주면서 내게 답하기를 요하니 드디어 이 지음이 있게 되었다 뒷날의 고승과 큰 은자가 선인장차를 알면 중부선자와 청련거사 이백에게 나온 것이다."

我有乳泉  成秀碧百壽湯 何以持歸木覓山前獻海翁 
내게 유천乳泉이 있어 떠서 수벽탕秀碧湯과 백수탕百壽湯을 이루니 어떻게 목멱산 앞에 지녀가 해옹海翁에게 드릴까.

<소>
1)여기서 목멱산은 서울의 남산을 지칭하고 해옹은 앞에 나온 해거도인을 말함.
2)유천은 구체적으로는 특히 종유석의 샘을 말하니 석회암지대에 나는 흔히 쌀뜨물샘이나 미면米麵샘 등으로 불리는 뿌연샘물이 되겠으며 당집이나 절등이 따라 세워지곤 했다.

(唐蘇 著 十六湯品, 第三曰百壽湯 人過百忍 水逾十沸 或以話阻 或以事廢 如取用之 湯已失性矣 敢問  蒼顔之老夫 還少執弓抹矢以取中乎 還可雄闊步以邁遠乎 第八曰秀碧湯 石凝天地秀氣 而賦形者也 琢而爲器 秀猶在焉 其湯不良 未之有也.
近 酉堂大爺 南過頭輪 一宿紫芋山房 嘗其泉曰 味勝 酪)
당나라 소이가 지은 16탕품湯品에, 제3번째를 백수탕百壽湯이라 말하니 사람은 백번 참음을 격고 물은 열번 끓음을 넘긴다 혹 말을 더듬거나 일을 폐하게 된것으로도 취해 쓸것 같으면 탕은 이미 실성함이라 감히 묻노니 흰 귀밑머리에 창백한 늙은이가 도로 젊어져 활을 잡고 화살을 겨누어 적중할수 있는가 도로 웅장히 활보해서 멀리 갈수 있는가 제8번째를 수벽탕秀碧湯이라 하니 돌은 천지의 수기秀氣가 엉켜 형상을 받은 것이다 쪼아 그릇하면 빼어남이 오히려 존재하니 그 끓인 물이 좋지 않음은 있지않다.
근래에 유당대야酉堂大爺가 남으로 두륜산을 지나다가 자우산방에서 하루 묵었는데 그 샘을 맛보고 말하길 맛이 소락 酪보다 낫다.

<소>
1)십육탕품의 저자로 알려진 소이는 소우蘇虞로도 쓰였으며 그에 대해서는 불명하고 도곡의 청이록에 소이의 선아전仙芽傳이 초록되었는데 이 선아전의 제9권이 십육탕품이 되며 선아전은 지금 전하지 않고 십육탕품은 글이 당대에 추숭된 노자의 영향이 깊다 위의 백수탕 만드는 과정의 서술이 어째 좀 꺼림칙한데 단지 오래살며 벼라별 험한일을 격으며 인생 수련해 늙은생강처럼 노익장하는 것을 말하기보다  평소의 덕이 부족한 사람이 우연히 이런탕 마시면 혹시 백수광부가 마신 술처럼 제정신 못차리고 갑자기 분폭해 힘내게되는 것은 아닌가 불의 본성이 뜨겁고 오르듯이 물의 본성은 차고 내리는 것인데 물과 불이 혼연히 하나된 혼돈탕을 지나 계속 가열하면 열이 이겨 마침내 부글부글 물이 본성을 잃고 우화등선 기화하는 것이겠지 탕의 노老니 눈嫩이니 하는 것은 곧 실성탕과 혼돈탕에 서로 가까운것이 되겠다..
2)유당대야는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1776-1840)으로 진도에 귀양살다 오던 길에 들렀던 것으로 보인다.

又有九難四香玄妙用 / 또 구난九難 사향四香의 현묘한 작용있으니

(茶經云 茶有九難 一曰造 二曰別 三曰器 四曰火 五曰水 六曰炙 七曰末 八曰煮 九曰飮 陰采夜焙 非造也 嚼味嗅香 非別也  鼎腥  非器也 膏薪 炭 非火也 飛湍壅  非水也 外熟內生 非炙也 碧粉飄塵 非末也 操艱攪遽 非煮也 夏興冬廢 非飮也.
萬寶全書, 茶有眞香 有蘭香 有淸香 有純香 表裏如一 曰純香 不生不熟 曰淸香 火候均停 曰蘭香 雨前神具 曰眞香 此謂四香)
차경에 이르기를 차에는 아홉 가지 어려움이 있으니 하나는 제조요 둘은 감별 셋은 차그릇 넷은 불다루기 다섯은 물 여섯은 차굽기 일곱은 가루하기 여덟은 다리기 아홉은 마시기이니 음산한 날씨에 차를 따서 밤에 불 말리는 것은 그 제조가 아니며 차를 씹고 향을 맡음은 그 감별이 아니며, 누린솥에 비린잔은 그 그릇이 아니며 진 나는 나무나 주방 숯은 그 불이 아니고 날아 내리는 여울물과 고인 물은 그 물이 아니고, 겉은 익었으나 속이 날것은 그 적炙이 아니며 푸르스름한 분진이 휘날리는 것은 그 가루함이 아니며 잡기 힘들어 후딱 휘젓는 것은 그 다리는 것이 아니며 여름엔 마시기 잘하고 겨울에는 그만 두는 것은 그 마시는 것이 아니다.
만보전서萬寶全書에 이르기를 茶에는 참 향香과 난향蘭香 맑은향 순진한 향이 있다. 안밖이 똑같은 것을 순진한 향, 설지도 않고 너무 익지도 않은 것을 맑은 향, 불이 고루 든 것을 난향, 곡우(4월 20일경) 이전의 싱그러움이 갖추어진 것을 참향이라 하니 이를 네가지 향기라 한다.

<소>
1)여름엔 잘 마시고 겨울엔 그만둔다는 것은 차의 성질이 차운 것에 따라 그러기 쉬운 것을 두고 한 말이다.

何以敎汝玉浮臺上坐禪衆
어떻게 가르칠까 너희 옥부대 위에서 좌선하는 무리들을

<소>
1)옥부대라는 이름은 신라때 거문고의 명수 옥보고玉寶高가 이곳에서 거문고 수련을 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또한 옥천사 진감화상은 처음으로 신라에 불교노래인 범패를 전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있다.

(智異山花開洞 茶樹羅生四五十里 東國茶田之廣 料無過此者 洞有玉浮臺 臺下有七佛禪院 坐禪者 常 晩取老葉日+麗乾 然柴煮鼎 如烹菜羹 濃濁色赤 味甚苦澁 政所云 天下好茶 多爲俗手所壞)
지리산 화개동花開洞에 차나무가 사오십 리에 걸쳐 퍼져 자라는데 우리나라 차밭의 넓기로 아무것도 이를 넘는 곳이 없다 화개동에 옥부대玉浮臺가 있고 그 밑에는 칠불선원七佛禪院이 있으니 그 곳에서 좌선하는 자가 늘 늦게 늙은잎을 취해 볕에 말려 섶을 때어 솥에 삶는데 나물국 삶듯하니 짙고 탁하며 색은 붉고 맛은 몹시 쓰고 떫다 차정소茶政所에서 이르기를 "천하에 좋은 茶가 많이 속된 수완에 의해 훼손된다"

<소>
1)지리산은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 흥덕왕 3년(828)에 입당하고 돌아온 사신 대렴이 차종자를 지녀오니 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는데 차는 선덕여왕때 부터 있었지만 이에 이르러 성하게 되었다 한다 이때 심은 곳의 구체적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경남 하동군 화개면에 있는 쌍계사의 이때 원이름이 옥천사玉泉寺였고 이후 고려시대 이규보의 글에서 화계花溪가 차의 주생산지 임을 알수있다 조선전기에 이르러서는 김종직이 함양군의 수령을 지내며 자신이 지리산의 함양땅인 엄천사 일대의 대밭에 있는 차나무를 찿아 다시 차밭을 조성하였다고 하였다.
2)당 피일휴의 서문에도 육우 이전의 차마시기를 일컫는 자는 훌 한데 삶아 채소를 삶아 마시는 것과 다를바 없었다 한다 차다리기가 그랬다면 차따기 역시 이에 준해 다 퍼진 잎을 들깻닢 따고 뽕닢 훝듯해서 한줌에 쥐 문댓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 없던 음차법을 새로 개발한 사람들이라 할수는 없겠고 일부에만 전하던 보다 나은 음차법을 널리 유행시킨것이라 하겠다 정政은 정正하게 하는 것이라고 차산은 말했는데 정소政所는 특히 차일을 바르게 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 같다 그러나 위의 지리산 승려들의 차음은 초의가 전문차인으로서 약간의 자부심에 미처 진감 이래로 드리워 온 지리산 승려들의 차마셔 내려온 전통을 알지 못한데서 질색한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이무렵 까지 음차역사를 잘 살펴보면 이때 우리 차마시기가 서로간의 교류이동이 잦은 승려집단에 까지 그렇게 원시적이어서 그렇다고 볼수없다 그럴 형편이면 굳이 그렇게 까지 그런 차음을 해서 마시져 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명나라 장원의 차록을 만보전서에서 옮겨적은 차신전 말미에 초의가 쓴 발문에도 보면,
"무자년 비오는 무렵 스승을 따라 방장산 칠불아원에 가서 등초騰抄해 내려와 다시 정서正書하려하였으나 병으로 인해 끝내 못했는데 사미승 수홍修洪이 때마침 시자방侍者房에 있다가 차도茶道를 알고자해서 정초正抄하나 또한 병으로 마치지 못했다 그래서 좌선하는 여가에 힘써 관성자(*붓)에게 명령해 이루어 마쳤다 시작이 있으면 마침이 있음이 어찌 홀로 군자만이 하는 것이랴 총림叢林에 조주趙州의 끽다풍喫茶風이 있으되 전혀 차도를 모른다 그래서 초록해 가히 조심할바를 보인다.
경인년(*1830) 2월에 휴암병선休庵病禪은 눈 내리는 창가에서 화로를 안고 삼가 쓴다."
라고 했는데 만보전서를 들고 그걸 일부 몇자 베끼기 위해 지리산 꼭대기 칠불아원까지 간것은 아닐 것이고 칠불아원에 이미 차원의 필요에 따라 구비된 만보전서를 찿아가 베꼈다고 봄이 옳을 것으로 필요에 따라 차서가 준비되고 차음이 연구되지 않았던 것이 아니지만 다만 앞에서 초의가 말한대로 당시 지리산 승려들의 차음은 특히 하급 수도승들에게 취하는 얼차리기 차원의 한 차마시기 유습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꼭 수도의 의미를 떠나서라도 일반 하급수도승에게 약능으로서 보다도 그리 냠냠히 맛을 내는데 몰두해 먹이고 문방의 아취 같은 쪽으로 흐르지는 않았을 가능성은 다분한 것이며 더우기 차실을 꾸미고 보다 좋은 차맛을 내려는 것은 여우는 여우굴 답고 토끼는 토끼굴 답듯이 무사한 평상시의 생활 안에서도 자신의 이념에 따라 주변을 가꾸어 정서를 순화해 나가고 보다 삶의 소양을 아름답게 닦아나가자는 것이지만 경우에 따라 그 덕이 성립될 여건도 없고 근본도 모른채 보다 심각한 자리를 맞으면 바로 내 팽겨 쳐 지거나 수도의 과정에 대해서는 어디엔지 빠져버리고 그 지경이란 것만 따서 맛있는 차 한잔의 맛이 바로 깨달음의 맛 어쩌고 한다면 수도를 단지 낭만으로 여겨 할 뿐인가 저으기 한심스러워 질 수 있는 것으로 이런 식이라면 목마르고 간절할때 한잔의 술 한 까치의 담배 또한 그 간절한 번뇌를 해결해주는 희열이 오히려 차보다 더 한 바 있다고 익히 해학적으로 읊어져 왔으며 사실 일반적으로 볼때 수반되는 부작용이 차보다 커서 그렇지 그런점이 분명히 없다 할순 없을 것이다 송나라의 휘종은 그의 대관차론에서 말하길,
"일찌기 이르기를 땅으로 머리해 꺼꾸로 나는 것으로 사람이 구하는데 이바지 하는 것이 그 종류가 하나가 아니니 겉곡식과 조가 주림에 있어서와 실과 숫삼이 추위에 관한 것은 비록 범용한 사람과 아녀자도 모두 늘 필요해서 날로 쓰여 시세의 느긋하고 절박으로 흥하고 폐할수없다는 것을 안다 차와 같은 물건됨에 이르러서 구와 민의 빼어난 기운을 독차지하고 산천의 신령을 모아져 흉금을 떨치고 체한 것을 씻으며 맑음을 이루고  화기和氣를 이끌어 오는 것인즉은 범용한 자와 아녀자가 알수있는 것이 아니며 충화 담백하고 한가 깨끗이 운치 높고 맑음은 황급한 겨를에 얻어 좋아해 높일수 있음이 아니리 본조의 흥함에 해마다 건계의 공납하는 용단과 봉병의 이름이 천하에 으뜸하는데 학원의 품급이 또한 이로부터 성하여 지금에 이른다 온갖 폐했던 것이 모두 일으켜지고 해내가 편안연해져 손을 모아 성공을 우러러 바라고 뛰어난 선비가 치밀히 힘써 진신縉紳의 선비와 가죽바지에 베옷입은 이들의 흐름이 기름진 윤택에 목욕하고 덕화에 훈도되어 정아와 고상으로 성하니 서로 쫓아 차마시기에 종사한다 그래서 근세 이래 채택의 정밀과 제작의 공교 품제의 우수와 팽점의 묘가 그 극으로 성하지 않음이없다 또한 물건의 흥폐가 실로 스스로의 때가 있는데 그러나 또한 때의 꺼지고 솟구침에 관계해 때가 혹 황급한 겨를에 사람이 고달파 지침을 생각하면 좀전의 소위 늘 필요 일용하는 것에 오히려 또한 경영해 구하기 급급해서 오직 얻지 못할까 두려운데 차마시기를 어느 겨를에 의논하랴..."
휘종은 제왕의 몸으로 평생 단지 자신의 유희차인 두강으로 쾌하게 달려오게한 절대상품의 맛차로 천하에 떨치고 이로 함빡 백성을 이끌었을 뿐 차가 이런 외에 다른 것이 있는지 알래야 알수도 없었을 것이며 차가 원래 그런 물건으로 흔히 하는 말처럼 세상이 좋아지면 차가 잘 마셔지게 되고 차가 잘 마셔지는 것이 세상이 태평한 상서로운 표징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뒤에 정강의 변이 일어나 금나라의 포로가 되어 고배를 들게 되었을 때 어쩌면 진면목으로 왔을 차를 이 또한 깨우치고 기꺼이 더불어 감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태 그의 이력으로 보아 이름만 다 같이 차를 하고 다 같이 아무나 하기 어려운 것을 했어도 주나라 문왕인 창昌이나 공자가 창포뿌리로 담근 물김치를 찡그리지 않고 먹게 되게끔 수련한 것이나 진의 교육장 왕몽이 수액을 즐기게 되었던 이런 방면의 수련과는 전혀 극과 극인 남이 잘하려 하지 않는 쪽이 아니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쪽으로 이미 한평생 길을 달려온 차의 한 방면의 달인인데 이제 와서 여태까지의 차를 버리고 그 도도히 밀려오는 쓴 물을 갑자기 그리 쉽게 마실 수 있었을까 기대한다는 것조차 무리한 일이고 일도 이미 다 끝나고 말았던 것이니 이 또한 차라는 것이 만나는 사람에 따라 이루어져 가는 경우가 얼마나 다를 수 있는가를 말해 주는 것이 된다  비록 늘 병원에 놀러 가다가 어제는 몸이 아파 못갔다는 말처럼 심하지는 않아도 마치 용을 몹시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용이 자기를 반겨 줄 건가 해서 찾아가니 놀라 달아났다는 얘기나 왕희지의 글을 좋아해 사 모은 사람이 있어 글을 보러 가보니 가짜만 모아 놓았더라는 얘기처럼 그 차의 겉과 반만 뚜루루 훝었을 뿐 바탕과 내면은 알지 못한 것으로 시경 곡풍시에,
"習習谷風 以陰以雨 / 거듭한 골짝바람이 흐리고 비오네
민勉同心 不宜有怒 / 한마음으로 애써야지 성냄은 마땅치 않은것.
采봉采菲 無以下體 / 순무뽑고 잔무우 뽑음은 아랫도리때문만은 아니네
德音莫違 及爾同死 / 덕된 말을 어기지 않으면 너와 사생을 같이하리
行道遲遲 中心有違 / 가는 길 더디고 더딤은 속마음과 어긋남이 있기 때문
不遠伊邇 薄送我畿 / 멀리 바래주지도 않고 바싹 문간에서 나를 보내네
誰謂도苦 其甘如薺 / 누가 도고라 일렀나 그 달기가 냉이 같다
宴爾新昏 如兄如弟 / 너는 신혼에 즐겨 형같고 아우 같구나
涇以渭濁 湜湜其沚 / 경수가 위수로 흐려져도 군데군데 그 맑은기슭 있는데
宴爾新昏 不我屑以 / 너는 신혼을 즐겨 나를 생각해 주지도 않아
毋逝我梁 毋發我구 / 내 고기잡는 물막이에 가지말고 내 어살을 들추지마라
我躬不閱 遑恤我後 / 내 몸도 용납 못하는데 하물며 내 뒤를 생각하랴
就其深矣 方之舟之 / 그 깊은데 나아가면 뗏목하고 배하며
就其淺矣 泳之游之 / 그 얕은곳에 나아가면 헤엄치고 자맥질했지
何有何亡 민勉求之 / 뭐가 있고 뭐가 없을까하여 애써 구했으며
凡民有喪 匍匐救之 / 무릇 백성들이 상喪이 있으면 엎드려 구했는데
不我能휵 反以我爲수 / 나를 길러주지도 못하며 도리어 나를 원수로 여기며
旣阻我德 賈用不수 / 이미 내 덕이 막히자 팔리지 않는 물건처럼 여기네
昔育恐育鞫 及爾顚覆 / 예전에 전복했을 때 조심해 길러 놓으니
旣生旣育 比予于毒 / 이미 살만하고 이미 길러놓자 나를 독으로 비기는구나
我有旨蓄 亦以御冬 / 내 맛진 저축있음은 또한 이로 겨울을 감당하는 것인데
宴爾新昏 以我御窮 / 너는 신혼을 즐기고 나로 궁함을 때울 뿐이네
有洸有潰 旣이我肄 / 성내고 사납게 굴어 이미 내게 멋대로 하니
不念昔者 伊余來기 / 일전에 너가 내게 와 쉬던 것을 생각 않는가."
라고 읊은 것은 어찌보면 본래의 차가 맛차만을 알고 사랑한 휘종이나 양귀비를 사랑한 당 현종같은 사람을 두고 말한다면 그렇다 하겠다 주역에는 날벼락의 무망괘가 있고 곤괘의 문언전에는 결코 하루아침 하루저녁의 까닭이 아니라 알고 보면 그 말미암은 것이 점진한 것이라는 말이 있으며 본초강목에는 꾸준히 복용하면 어느날 갑자기 무망간에 몸이 망하는 약해에 대해 기백이 말한 것이 있는데 그러나 이것은 일단 외관상 모두 염제식경에서 말한 차를 오래 마시면서 서서히 나타났을 효과와는 역시 상대적인 것으로 휘종의 일이 결국 그렇게 되었으니 이 역시 그가 한 차일을 두고 빗대 말한다면 이미 그가 오랫동안 천하에 끼친 차독에 따른 것인가 지리산 쌍계사에 있는 진감화상비에 적힌 신라 진성여왕 1년(887)에 최치원이 지은 비문을 보면,
"혹 호향胡香을 드리는자 있으면 기와로 뭉근 잿불에 실을뿐 환으로 만들어 굽지 않고 말하길 나는 이것이 어떤 내음인지 먹음이 아니라 마음에 삼갈따름이다 하였다 다시 중국의 차(*漢茗)로 이바지 하는자 있으면 섶으로 돌솥에 불땔뿐 가루해 삶지 않으며 말하길 나는 이것이 어떤 맛인지 먹음이 아니고 배를 적실따름이다 하였으니 참을 지키고 시속을 거스름이 모두 이런 류였다."
수도인이 추구할 바는 차 이전에 도이며 물론 이 도가 매사 쓰고 고달파야하고 가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만은 아니겠지만 그게 도라면 또한 세상만사 도 아닌 것이 없을 도가 되어 새삼 도라 할 것도 없는 도를 하면서 한편으로 무슨 거룩한 수도의 이미지처럼 상표로 내걸어 팔아 어린백성을 신나게 해주는 차팔이 풍조가 성해지니 안의 본은 잊고 겉의 지엽만 쫓아가고 또한 차가 수도자의 수도가 있기에 사랑받기도 했던 것을 계기로 시늉만 있고 일은 없이 마치 차가 수도자를 살리고 그 수도의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길이요 심지어 바로 도 그대로이며 차마시는 쉬운 그로서 도가 이룩되게 해주는 것처럼 본말전도 되면 역시 그 반대 급부로 이렇게 환상을 깨는 일이 뒤따라 생기는 것이니 이로서 당시 신라의 속차풍조가 무슨 몇백년 된 산삼을 고아 나누어 마시는 듯 했지 않았겠나 되짚어 볼 수 있는 것이지만 후에 일제때의 한 조사기록에 의하면 당시 전남일대에서 조제해 마시던 엽전모양의 떡차도 민간에서 묻고 확인한데 의하면 매우 편리화 되어 제조에서도 송나라 단차처럼 쪄서 박아낸 떡을 배화불로 자금색으로 굽는 공정을 거치지 않고 덩이째 그냥 볕에 말려 둔 것을 전차때의 그 자리에서 구웠으며 또한 연자에 다시 갈아 삶지 않고 그대로 덩이째 뜨거운 물에 필요한 양만큼 덩이를 넣어 살짝 삶아 우리는 식으로 음료해 내는게 보통이었다 한다 물론 이런 방식은 다 형편과 경우에 맞게 적시에 조절하고 일률적으로 말하거나 한가지로 고집할 것은 없는 것이지만 참고로 명나라 허차서는 차소의 채적採摘 조에서 말하길,
항주의 풍속에 사발안에 촬점撮點(*차싹쥐어 잔에 놓고 탕을 점주點注해 대어 충화沖和해낸 즙수를 먹는 음료법, 촬포)하는 것을 기뻐하는 까닭에 극세한 것을 귀히한다 이치가 번거롭고 산만 울울하면 즉석에 할수없지 않겠나 오의 송강인이 우리고을의 용정차를 귀히 여겨 기꺼이 중가로 곡우전의 가늘은 것을 구매하는데 예전부터 늘 하던것에 매여 묘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九難不犯四香全 至味可獻九重供 翠濤綠香 入朝
아홉어려움을 범하지 않으면 네 향기 온전하니 지극한 맛 구중궁궐에 바쳐 이바지 할수 있겠네 푸른파도 녹색향 이제 입조하니

<소>
1)여씨춘추에 은나라 탕왕의 요리사이며 재상인 이윤의 설화로 탕에 구변九變 있다는 말이 나온다 또한 여기서 구난의 구九는 천장天長한 수로 곧 구중궁궐을 뚫고 가는 어려움이라 하겠다 초의는 산사에 적을 둔 몸이지만 불화를 그리는 솜씨도 갖추고 특산품을 지녀 권귀에 뚫고 명사들 사이를 오가며 소통한 사람으로 은근한 무슨 뜻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해서 후에 헌종에게까지 들려 호를 내려 받기는 하나 이에 이은 차에 대한 다른말은 없는 듯하며 동차송을 지은지 삼년뒤 1840년 정국이 바뀌며 추사가 제주로 귀양을 가게된다 또한 귀양지에서도 당지의 특산물을 갖고 진상하고 아울러 입지도 살려 사람과 물건이 서로 드러나게 되는 경우가 있지만 정약용이나 김정희 등이 모두 말년이 되자 겨우 귀양만 풀어 줬을 뿐으로 마치 복복하지만 죄를 짓고 벌을 피할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복이 있겠으며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식이되고 결코 제대로 반전해 권토중래한 것이 아님에도 기인할 것이다 물론 이는 결코 인물이나 차의 물건됨이 부족한데 기인 한다고 말할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른바 주역 비괘否卦에서 말한바 군자의 정貞함이 이롭지 않다 라고 하는 경우로 정약용의 일로 보더라도 이미 큰덕이 무너졌기에 귀양지에서 작은 풀덕이나 닦게되었다 할 것인데 어찌 하찮은 풀로 쉽게 다시 큰덕을 열어 올수있었으랴 이때 차가 궁중에 까지 파고 들었다면 당시 우리 차의 국면이 더욱 열렸을 것이나 아직 당시 조선에서는 차가 그렇게 기호품이 되지 못했고 수문제와 같은 계기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후에 초의의 사문제자 범해는 그의 차가에서 보림사 금설은 감영에 보내지고 화개의 진품은 전각의 폐하에 바쳐지고 함평 무안의 토산은 남방에 기이하고 강진 해남의 제작은 북경에 알려졌다 했으니 또한 열릴것 같으면 결국 그렇게 되는 것이지만 또한 이상 보는대로 결코 공연히 되어준 것은 아니었다.

(入朝于心君 茶序曰 區+瓦泛翠濤  飛綠屑 又云茶以靑翠爲勝 濤以藍白爲佳 黃黑紅昏 俱不入品 雲濤爲上 翠濤爲中 黃濤爲下.
陳 公詩, 綺陰 盖 靈艸試旗 竹爐幽討 松火怒飛 水交以淡 茗戰以肥 綠香滿路 永日忘歸)
주군되는 마음에 입조함이라 차서茶序에 말하기를 "잔에 푸른물결 뜨고 연자에 녹색가루 날린다" 하였고 또 "茶는 푸른취색으로 낫게 치고 물결은 여린쪽빛을 가佳하게 친다 누르고 검으며 붉고 어두운 것은 모두 품등에 들지 못한다 구름같은 물결이 위가되고, 푸른물결이 중품, 누런물결이 하품된다." 하였다.
진미공의 시에, 기비단의 얇은그늘로 덮개하고 신령한 풀로 기차旗茶를 시차試茶한다 죽로竹爐를 그윽히 심토하니 솔가지 불은 노하여 날은다 물은 담백으로 사귀는데<*논어에 군자의 사귐은 담백하기 물 같다 함.> 차싸움은 비유肥乳한 것으로 승부한다 녹색향 길에 가득하니 해 길도록 돌아갈줄 모르네.

<소>
1) 진미공(1558-1639)은 陳眉公이라고도 쓰며 명나라 사람 진계유로서 당시 여러 명류와 차를 품론하던 사람인데 의흥의 자사기 명수인 시대빈이 듣고 작품으로 찾아뵈어 서로 교류가 있었다.
*투시차鬪試茶는 명전茗戰이라고도 하며 송대에 유행하던 말차로 서로 우열을 겨루는 시합인데 잘 갈은 찻가루로 반죽해서 데운 검은잔에 놓고 탕수를 몇차례 나누어 개어 저으면 젖을 끓이고 식으면 위 표면에 뜨는 막膜인 소 와 같이 점착질의 죽면이 뜨는데 이것이 얼마나 오래 잔에 물고 떠있느냐와 좁쌀 같은 꽃이 잘 피는 것 그리고 색이 얼마나 희고 깨끗하나 등의 우열로 승부한다 잔이 뜨겁지 않으면 죽면이 뜨지 않고 차가 희니 잔도 검어야 했다.
2) 당 온정균의 채차록에 보면 차인으로 견땅의 공자 이약의 일화에 대해 나오는데,
"이약은 견땅의 공자다 일생 분바르고 대미그린 이를 가까이 않고 성미는 차를 구별했다 일찌기 말하길, 차는 모름지기 느긋한 불에 굽고 살은 불에 다린다 활화活火는 탄불의 불꽃이 있는 것을 이름이다 마땅히 탕이 망동해 끓지 않도록 해야 차를 기를수있다 시작에는 어목이 산포하고 미미히 소리 있으며 중간에는 사방에서 샘솟는 것이 줄줄이 구슬 잇고 끝에는 솟구치는 파도가 북을쳐 물의 기가 모두 소멸하니 노탕이라 이른다 세가지 끓는 법이 활화가 아니면 이룰수 없다. 객이 이르면 잔수에 제한없이 종일 불질해 차그릇을 잡는데 귀찮아 않았다 일찌기 사명을 받들고 협주의 협석현 동쪽에 이르렀는데 그 도랑물이 맑게 흐르는 것을 사랑해 열흘동안 출발을 잊었다"

聰明四達無滯壅  爾靈根托神山
총명이 사방트여 지체하고 막힘이 없네 하물며 너의 영험한 뿌리를 신산에 의탁하니

(智異山 世稱方丈.)
지리산은 세칭 방장산方丈山이라 한다.

<소>
1) 사방 한길을 방장이라 하는데 유마거사가 이런 방에서 수도한데서 비롯한 선실을 가리키는 말이라 하며 또 부처가 있는 곳을 말하기도 하고 주지를 일컫는 말도 된다 한다 그러나 여기서 방장은 이런 뜻 보다도 그 이전의 사기 봉선서에 말한 발해 가운데 있는 삼신산인 봉래, 방장, 영주의 하나인 방장산의 뜻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仙風玉骨自別種 綠芽紫筍穿雲根 胡靴 臆皺水紋 
선풍옥골仙風玉骨이 스스로 별다른 종자로다 녹색싹 자주순은 구름의 뿌리를 뚫고 되 사람의 가죽신과 들소가슴에 주름진 물결무늬로다

(茶經云 生爛石中者爲上 礫壤者次之 又曰 谷中者爲上 花開洞茶田 皆谷中兼爛石矣 茶書又言 茶紫者爲上 皺者次之 綠者次之 如筍者爲上 似牙者次之 其狀如胡人靴者蹙縮然 如 牛臆者廉沾(*衣+詹)然 如輕飇拂水者涵澹然 此皆茶之精 也)
차경에 이르기를 난석爛石 속에서 난 것을 위로 치고 자갈흙에서 자란 것이 그 다음이라 하고 또 골짜기 안에 것을 위로 친다 했는데 화개동의 차밭은 모두 골안에 난석爛石을 겸했다 차서에 또 말하기를 "자색紫色을 위로치고 주름진 것이 다음이요 녹색綠色이 다음이며 순筍같은 것을 위로치고 싹 비슷한 것이 다음이다 그 모습이 마치 호인胡人의 가죽신 같다는 것은 쭈구러져 줄은듯하고 들소가슴 같다는 것은 서슬지게 가지런함을 말하고 가벼운 바람이 물을 떨치는 같음은 잔잔한듯 함을 말함이니 이는 모두 차의 정수精 다" 하였다.

<소>
1)본초강목 명부茗部의 집해에서 차경의 글을 인용하면서 첨沾으로 표기 되었는데 첨衣+詹의 글자가 번거로워 음을 빌려 쓴 것을 동차송에서 따라 옮긴 것으로 보인다 차경에는 위 렴첨의 첨沾이 앞치마 첨衣+詹의 첨자로 되어있음 첨은 옷이 나폴거리는 모습을 말하기도하고 가지런한 모습을 말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논어 향당편에 옷이 앞뒤 첨한듯 하다 한대로 가지런한 모습 .
2)골안에 난석을 겸했다는 것은 특히 석회암이 풍화가 잘되기 때문을 말하는 것 같다 이름난 차로 석회암지대의 것이 많은 듯하다.
3)봉 은 이아의 석축釋畜 편에서 폭우牛+暴牛라 했는데 진 곽박이 주하기를, 즉 봉우다 등마루 위에 살이 솟고 피부가 일어나 높이 이척남짓하며 꼴이 낙타 같으며 살이 한쪽 변두리에 안치鞍置되었다 건강히 가는 것은 하루 삼백여리를 달린다 지금 교주 합포 서문현에 나온다.했으며 청나라 학의행은 여기에 소를 하기를, 또 한 이름으로 일봉탁타 라하며 대월씨국에 난다.했으며 옥편의 우牛부에는 야우野牛라 했다. 
자아紫芽는 고산의 척박한 땅에서 난다하며 그 기미도 박하다한다 수분이 메마르고 영양이 넉넉치 않아 처음 잎이 나올 때 빨갛게 나오는 것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거름과 물을 충분히 준 온상상치와 척박한 땅에서 자란 노지 상치가 맛이 다르듯이 순도가 높을 것 같다 아芽는 가지의 눈에서 자란 것이고 순筍은 죽순이나 고사리처럼 그루터기나 뿌리에서 오른 것이고 묘苗는 종자뿌려 나는 것이 되겠다.
차를 우전 화전 등으로 따는 시기에 따라 상품가치를 분류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이는 중국에서도 일부지대 안에서도 특정장소에 따라 맞춰나온 말로서 그나마 산위의 응달과 산아래 양달이 서로 현격히 달라 고개를 지나다보면 산밑은 참꽃이 다 졌을 즈음 고개마루에는 막 트고 있는 것을 볼수 있으며 봄에 벌칠때 경북일원의 대개 해발 1000미터를 넘지 않는 지역의 아카시 꽃피는 것이 산밑과 봉우리 가까이가 보름이상 차이나고 있으며 당장 우리집은 마당이 마을의 밑에 집 지붕위로 반층 더 높을까 싶을 정도일뿐으로 북향땅도 아닌데 집에 큰나무가 있어 기온이 낮는지 어쩐지 겨우 이만한 높이에 이렇게 차이 나는가 싶게 마을밑이나 인근시가지보다 같은 꽃피는 것이 무려 열흘은 늦는 듯 해  꽃이 같거나 특히 이른 봄꽃을 보려는 경우는 다른 곳에 이미 싫컷 꽃핀 것을 보고 그제야 집에서 보게 되어 영 감상이 아니다 또한 그해의 기후가 다소 이르고 늦은데 따라서도 차이가 나는 것으로 절대적 기준이 될수없는 것이다 다만 계절적으로 청명무렵에서 곡우전은 봄의 건조기가 되어 차나무가 봄비에 의한 객물을 받지않게 되어 비를 받은 과일이나 장마기의 참외처럼 맛이 빠지게 되지않고 순도가 높을것을 추리 할 수 있으니 차딸 때 이점은 다소 고려할 수 있겠고 그러나 역래로 이름난 차가 산지에 따라 경칩에서부터 입하까지 다양하며 심지어 남쪽으로는 겨울에 따기도 했으니 달리 상관될 것은 아닌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고지대가 아니며 가장 남단인 마라도에 차를 심으면 해마다 우전에 따기 충분할지 모르겠으며 꼭 그래서는 아니라 해도 종래 우리나라에서는 채차시기에 따라 분류하기 보다 여리게 싹트는 정도에 따른 상품차의 이름인 작설차가 곧 대용차가 아닌 바로 원래의 차를 말하는 인식으로 일반화되기까지 했다.

吸盡  淸夜露 三昧手中上奇芬
양양한 맑은 밤이슬 다 마시고 삼매에 든 손안에 기이한 향 분분히 오른다

(茶書云 採茶之候 貴及時 太早則香不全 遲則神散 以穀雨前五日 爲上 後五日 次之 後五日又次之 然 驗之 東茶 穀雨前後太早 當以立夏前後 爲及時也 其採法 徹夜無雲 水+邑露採者爲上 日中採者次之 陰雨下不宜采.
老坡送謙師詩曰 道人曉出南屛山 來試點茶三昧手.)
차서茶書에 이르기를 "찻잎을 따는 시후는 때맞춤을 귀히하니 너무 이르면 향이 온전하지 못하며 늦으면 차신이 흩어지니 곡우에 앞선 5일을 위로치고 곡우뒤 5일은 다음이고 이후 5일은 또 그 다음이다" 하니라 그러나 경험해보면 우리차는 곡우전후는 너무 이르고 당연히 입하<*5월 5-6일경> 전후로 적당한 때를 할것이다 그 따는 법은 밤새도록 구름없어 이슬에 젖은 것을 딴 것이 상품되고 한낮에 딴 것이 다음되며 흐린 날씨에 비아래서 따기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늙은 소동파가 겸 대사를 송별하는 시에 말하길 "도인이 새벽에 남병산에 나갔다 와서 삼매의 손으로 차를 점주해 시차한다"

<소>
1) 남병산은 절강성 항주시 서호의 근처있는 산이다 삼매는 참선의 가장 깊은 경지를 말하는 것이라하며 앞의 시구는 소동파의 송남병겸사送南屛謙師 시에 나온다.

中有玄微妙難顯 眞精莫敎體神分
속에 현미하고 미묘함있어 나타내기 어려우니 참된 정수는 체體인 물과 신神인 차가 나뉘지 않게 함이라.

<소>
1) 육우의 차경 삼지조三之造 편에서도 차의 잘해내고 못해내고는 구결口訣에 있다했다 그러나 또한 주역 계사전에서 말하길 글은 말을 다할수 없고 말은 뜻을 다할 수 없다했으니 구결로도 부족함이 없다 할수 없을 것이다 말로 전하는 것은 그 거친 것이니 가르쳐줄수 있는 것은 법法일뿐 그 묘妙는 아니며 또한  비록 앞에서 그 묘를 보이며 바로 구결해 일러 가르침을 다해도 염제식경에서 말한대로 그 체화한 묘는 스스로 일취월장 쌓아 터득해 나가는 것이다.
2) 체는 물이고 신은 차라는 것으로 이것이 나누어지지 않게 한다는 것은 다른 뜻이 아니라 서로 적절한 가회가 못되는 물과 차를 배합함으로 이것이 서로 혼연하지 못하게 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해를 쉽게 하고자 물과 차로 구분해 설명한 것이니 홀로 차뿐 아니라 샘물과 강물 바닷물이 각기 체에 따른 신이 다르고 같은 샘물로 말하더라도 그나름대로 맛은 물론 색 향이 다 같다 할 수 없는 것이니 크게 보면 차와 물을 합해 찻물로 통털어 말하고 신神을 차맛으로 알아본다 말할 수 있겠다.

(造茶篇云 新採揀去老葉 熱鍋焙之 候鍋極熱 始下茶急炒 火不可緩 待熟方退 徹(*撤)入 中 輕團枷數遍 復下鍋中 漸漸減火 焙乾爲度 中有玄微 難以言顯
泉品云 茶者 水之神 水者 茶之體 非眞水 莫顯其神 非精茶 莫窺其體)
조차편造茶篇에 이르기를 "새로 따온 찻잎은 늙은 잎을 가려내고 뜨거운 솥에서 茶를 불말리되 솥이 극히 열한 것을 보아 찻잎을 넣어 급히 볶고 불은 완만히 할수없으니 열기가 막 물러나기 기다려 걷어 대그릇 안에 넣고 가볍게 굴려 두루 털어 흔들고 다시 솥안에 넣어 점점 불을 줄이면서 불마르는 것으로 헤아린다 이가운데는 미묘함이 있어 말로 나타내기 어렵다".
천품泉品에 이르기를 "차茶는 물의 신神이요 물은 茶의 체體니 진수眞水가 아니면 그 신神을 나타낼 수 없고 정차精茶가 아니면 그 체體를 볼수 없다."

<소>
1) 철徹은 원래 장원의 차록에서 앞의 채차편의 뚫을 철徹과 뒤 조차편의 거둘 철撤이 착오로 서로 바뀐것을 만보전서에서는 둘다 뚫을 철로 옮겨적고 이에 따라 동차송에 그대로 옮겨진 것으로 거둘 철撤의 뜻으로 옮겨야 한다.
2) 글의 배치로 보아도 또한 여기서 말하는 정차精茶가 단지 잘 가린 질 좋은 차를 넘어 정제히 조차造茶된 차를 말하며 곧 조차와 다리기가 일치되야 함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일일히 차에 어떤 물이 좋고, 어떤 물이라야 하고 또는 어떤차에는 어떤 물이 맞고 따위로 말할수는 없는것이기에 진수 정차로만 말했는데 찻물에 차신이 얼마나 영묘하게 갖추어 졌는가는 맛을 봐야 알겠지만 마치 관상을 보는 같아 그간 경험에 따라 맛보는데 까지 가지 않아도 그 우러난 색택등을 보고 차신의 정도를 대강 짚어 볼수 있지만 특히 간혹 새로운 물이나 차를 쓸때 원하는 색택을 내어도 막상 맛을 보면 차신을 제대로 발해 낸 것이 아닐수 있다 차를 음료해 내는 일은 이 차신이 얼마나 맛으로 잘 나타내느냐라 할것인데 물론 물이나 재료차가 될것을 가지고 되게하지 안될것을 되게하는 것은 아니기에 앞에서 특히 물과 차의 좋은 재료구비를 강조한 것인데 재료를 가리는 안목을 구비함이 그리 간단치 않음이 당 이찬황의 차가리기 일화가 말해주며 설혹 좋은재료를 구비했다 하더라도 재료가 그렇게 좋으면서 맛이 또한 없으면 어찌하나 할 수 있을 만큼 이로 바로 다리기만 하면 쉽게 차신을 갖추는데로 직결하는 것은 아니다 신은 체의 총화해 나오는 것인데 겉만 흡사했지 차재료 자체가 차신을 내기에 부족한 것이어서 그럴수도 있겠고 또 재료에 따라 그간의 경험으로 쌓은 통념을 좀 벗어난 것이어서 묽거나 너무 짙게 된 경우 등이라 하겠다 즉 차에 대한 일반적 개념이 없을수는 없고 여기에 후각까지 동원해 향을 느낀다던지 하면 다소 확률을 높이겠지만 공자도 외모로 보거나 말만 듣고 사람을 처음엔 잘못 짚었다는 것이니 이것이 결코 절대적이거나 그리 세부적인데 까지 지배 구애 될 수는 없는 것으로 오히려 어떤 차는 어떤 기미를 나타낼때 가장 중정을 얻음이다라는 것을 명심해서 행동에 말이 따르듯이 이것이 늘 맛을 보고 체를 되짚는 것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아야 할것이다.

體神雖全 猶恐過中正 中正不過健靈倂 
체와 신이 비록 온전해도 오히려 중정中正을 넘을까 두려우니 중정은 건健과 영靈을 아우르는데 지나지 않는다.

<소>
1)차신이 우러난 차라고 모두 맛이 한결같지 않을 것이나 다만 이는 차신의 저마다의 다른 유형으로 볼수 있는 것인데 이와 달리 차신의 영묘함에서 건健이 부족하면 이른바 마의상법에,
"잠깐 보면 얼굴 가득히 정精한 신이 있으나 오래있으면 원래대로 색 어둡게 바뀌니 이 같은 사람은 끝내 수명 단 하고 쪼대로 수壽 있다 하면 역시 외롭고 빈하니라" 라고 말한 것처럼 되어 차신이 박약한 경우가 되어 차를 품하는 말로 흔히 곧 누렇게 변하느니 맛이 깊게 오래지 못하다느니 하는 말이 여기 준한다 하겠다 즉 건健하다는 것은 차신이 건해 이로 영묘하다는 것으로 볼때 건은 차신의 체로서 그 바탕을 두고 말한 것이고 영은 그 작용의 모습으로 말한 것이라 볼수 있다 물론 물에 물탄듯 이맛도 저맛도 아닌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겠고 비록 쓰고 떫어 맛이 아닌 것일 지라도 약신藥神의 차원에서 논해 가상함을 구할 수 있다.    

(泡法云 探湯純熟便取起 先注壺中小許   冷氣 傾出然後 投茶葉多寡宜酌 不可過中失正 茶重則味苦香沈 水勝則味寡色淸 兩壺後 又冷水蕩滌 使壺凉潔 不則減茶香
盖罐熱(*熟)則茶神不健 壺淸則水性當靈 稍候茶水沖和然後 令布 飮  不宜早 早則茶神不發 飮不宜遲 遲則妙馥先消)
評曰 采盡其妙 造盡其精 水得其眞 泡得其中 體與神相和 健與靈相倂 至此而茶道盡矣.) 
포법泡法에 이르기를 "탕湯이 순전히 익음을 탐지하면 바로 취해내어 먼저 차호茶壺 안에 조금남짓 부어 냉기를 가셔 내어 기울여 낸 뒤에 차잎을 많고 적음이 알맞게 짐작해 넣고 적량을 넘어 바름을 잃게 할수없다 차가 많으면 맛이 쓰고 미끄럽지 못하며 물이 더하면 맛이 부족하고 색이 맑다 두번 차호에 탕수한 뒤에는 또 냉수로 씻어내어 호병이 시원 깨끗하게한다 그러지 않으면 차의 향을 감한다
대개 관罐이 뜨거우면 차신이 강력하지않고 차호가 맑으면 물의 성질이 당연히 영묘할 것이다 조금 찻물이 우리어 충화된 뒤에 베풀어 걸러 마시게 한다 거르는 것은 조급함이 마땅치않으니 이르면 차신이 발하지 않고 마심에는 더딘것이 마땅잖으니 더디면 묘한 향이 먼저 사라진다."
평론해 말하니 차따기는 그 묘를 다하고 제조는 그 정精을 다하며 물은 그 참을 얻고 포차에는 그 적중을 얻어 체와 신이 서로 고루어지고 건健과 령靈을 서로 아울면 이에 이르러 차도는 다한다.

<소>
1) 포법은 이전의 말차를 삶는 것과 상대적으로 명나라 때부터 유행한 엽차를 탕수에 우려 충화沖和해 낸 즙수를 마시는 방법이다.
2) 순숙純熟에 대해서는 장원의 차록에서 탕변湯辨 조목을 옮기면,
"탕 의 구별.
물을 끓일 때에는 세가지 큰 구별과 열다섯가지 작은 구별이 있다 일왈 형변形辨이라하고 이왈 성변聲辨이라하고 삼왈 기변氣辨이라하니 형태를 가리는 것은 내면을 분별하는 것이 되고 끓는 소리를 가리는 것은 외면으로 분별하는 것이 되며 기氣는 성공을 분별하는 것이 된다 끓을 때 마치 새우눈알  게눈알 고기눈알 연이은구슬 같은 것은 모두 맹탕萌湯이 되어 바로 솟구쳐 끓는데 이르러 비등하는 파도와 북치는 물결 같아 수기水氣가 모두 소멸되어야 이것이 순숙純熟이다 처음 물끓는 소리(*初聲), 바뀌어 끓는 소리(*轉聲), 떨쳐 끓는소리(*振聲), 소낙비 듣는 소리(*驟聲)는 모두 맹탕이니 그대로 소리없는데 이르러서야 비로소 순숙純熟이 된다 김이 한줄 두줄  서 너줄 떠오르고 줄기가 어지러이 가리지 못하는데 이르러 기운이 인온히 쌓이고 어지러이 에움이 모두 맹탕萌湯이 된다 여기서 바로 김이 그대로 부딪쳐 관통하면 막 이것이 순숙純熟이다."
3) 그런데 "대개 차罐이 뜨거우면 차신이 강력하지않고" (盖罐熱則茶神不健)가 인용된 장원의 차록에서는 "관이 익으면 차신이 강력하지 않고"(罐熟則茶神不健)로 되어 열熱이 숙熟으로 되어있다 앞구에 차를 우리는 차호를 먼저 탕으로 냉기를 가신다는 말과 탕으로 두번 호병한 뒤에는 냉수로 씻어 둔다는 말로 보아 탕으로 일차 차호의 냉기를 가시고 다시 탕을 부어 차를 뜨겁게 우리고 나면 맑은 물로 차호를 청결히 해둔다는 말이 분명한데 또 관이 익으면(열하면) 차신이 강력하지 않다 하니 호병과 달리 관罐은 물 끓이는 탕관을 말하며 익숙히 쓰인 사토탕관에 끓인 물은 차신이 건健해지지 않는다는 말로 보인다.
4) 고려 인종때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와서 몇달간 머무르며 그리고 적은 견문을 돌아가 휘종에게 바친 서긍의 봉사고려도경의 권제32 기명器皿3 차조茶俎조목에 보면,
"차 도마.
토산 차맛이 쓰고 떫어 입에 넣지 못하고 오직 중국의 납차와 선사한 용봉단을 귀히 여기니 선사하고부터 외에도 상인들도 통해 파는 까닭에 근래 자못 차 마시길 즐겨하여 더욱 차구를 갖추어 금화오잔金花烏盞 비색소구翡色小  은로銀爐 탕정湯鼎 모두가 중국제도를 본받은 것이다 무릇 연회하면 조정 가운데서 삶아 은으로 된 연꽃으로 덮고 느긋이(*徐)걸어 나오는데 자리를 돕는자의 말에 따라 차가 두루 가고야 마실 수 있어 식은 차를 마시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서긍은 돌아가 휘종에게 복명하면서 역시 차의 선진국으로서 아직 고려의 차음이 자신들의 더운차의 이해를 중시하는데 못 따르는 것처럼 굳이 말하고 있는데 그러나 이는 무리지은 차회의 시차施茶로서 다소 음차에 만족하기 어려운 점이 있음은 당시로서는 피하기 어려운 일이며 단지 못마땅하게 본 것은 그때그때 차가 나오는 대로 마시게 하지 않고 모두 기다려 동시에 들게 함으로 차를 식게 해 효용을 감하게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어수선히 산만해지기 쉬운 대신에 정돈을 지키려는 것으로 시차에 있어 이쪽 아니면 저쪽을 양보해야 되는 문제가 되어 각기 상황이나 입장 그리고 풍습의 예규에 따라 우선하는 측면이 고려되야 하겠고 특히 더운차를 중시하는 중국에서도 당시 기방에서 차를 낼때 기생들이 전족을 했기에 잘 걷지를 못해 차 내어 오는 것이 더뎌 식은 차를 마시게 된다는 것으로 차음의 수준문제에서 의논 된 말이나 될 말도 아니라 하겠다 현행본 주역 택수곤澤水困 :ㅣㅣ:ㅣ: 괘의 구사에, 서서히 온다 금차金車에 곤하다 린吝하나 마침이 있다.라는 효사가 있는데 당나라때 새로 공영달에 의해 진나라 왕필이 주석한 주역이 관학으로 인정되어 널리 보급되는데 반발해 역시 당나라의 이정조가 그 이전의 후한말엽의 정현이나 후한말 삼국시대 사람인 우번등의 제가의 설을 편집한 주역집해본에 보면 이 구절의 서서徐徐가 도도  로 되어 있다 물론 음이나 뜻이 "徐徐"와 같다고 주석 되어있다 곤困괘의 구사 양효가 변해 음효가 되면 곤괘가 험을 상징하는 물이 거듭있는 습감 :ㅣ::ㅣ:괘가 되니 서徐가 중복해 서서히 오는 것이다 설문에 서徐는 안행安行이라 했으니 소동파가 적벽부에서 맑은 바람이 서래徐來하니 수파水波가 일지 않는다 한 것처럼 안전운행함은 앞에 험함을 보기 때문인 것이다 즉 서서히 차를 내어 오는 것은 찻물을 그르치지 않으려는 이상의, 차를 맛으로 대하기 이전의 뜻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5)차글에 있어 평왈評曰 이라는 문투는 명 도빈수의 명급에서 찬왈贊曰, 평왈 등으로 나온다 이상으로 여기 차도는 다른 뜻이 아니고 시중의 다방업주나 종업원에게까지 두루 다 적용돼 통하는 바로 차마시기 까지의 최선의 음료해내는 방도를 말한 것일 뿐아니라 차도는 이로 모조리라고 규정 되었다 그런데 장원 차록에서는 만들때 정精히하고 간직할때 조燥하게하고 우릴때 결潔하게 하면 차도는 다 한다 한 것과 달리 초의는 평론에서 차따기는 그 묘를 다하고 제조는 그 정精을 다하며 물은 그 참을 얻고 포차에는 그 적중을 얻어,라고 한 것은 동차로 말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남중국과 달리 물이 원래 깨끗하기 마련이었으며 기후도 차가 저장에서 흔히 뜨고 변질 되기 쉬울만큼 열습하지도 않아 이것이 여타보다 큰 문제가 되기 부족할 뿐 아니라 보다 심화되고 적중한 논정이라 하겠다.

一傾玉花風生腋 身輕已涉上淸境
옥화 한번 기울이니 바람이 겨드랑에 일어 몸 가벼이 이미 위의 맑은 경지로 건넌다

<소>
1)옥화는 말차의 젖꽃거품을 미칭美稱한 것이다.

(陳簡齋茶詩, 嘗此玉花句 盧玉川茶歌 唯覺兩腋習習生淸風)
진간재陳簡齋의 차시茶詩에, 이 옥화玉花를 맛보다" 는 싯구.
노옥천盧玉川의 차가茶歌에, 오직 두 겨드랑이에 맑은 바람 산들산들 나는 것만 느낀다.

<소>
1)진간재(1090-1138)는 송나라 낙양사람 진여의陳與義로 자는 거비去非 간재는 그의 호 시에 능해 처음 황정견 및 그의 강서파의 영향을 받았으나 남송초에 영남으로 피난오고는 비장처량한 시풍이 두보와 비슷했다 한다.
2)노옥천(약796-835)은 당나라 범양사람 노동으로 옥천자라 자호하고 어려서부터 소실산에 은거하고 집이 빈궁한데서 힘들여 공부했다 감로의 변이 있을때 재상 왕애의 집에 유숙하였다가 왕애와 동시에 해를 입어 죽었다 옥천자 시집이 있고 그의 시는 자못 한유 맹교등의 찬사를 받았는데 시의 뜻도 뼈에 새길듯 하고 험한 바 있고 말은 유은했다한다 감로의 변이란 감로가 내렸다고 속여 환관들을 꾀어 들여 척살하려 했는데 중도에 바람이 불어 장막으로 가린 무사들이 탄 말의 다리가 드러나 발각되어 실패하고 이로 조정관리파 들이 반격 당한 사건을 말한다 위 시구는 맹간의가 새차를 보내준데 대해 즉석해 지은 주필走筆로 사례한 답시에서 일곱완 째의 구절이다. 

明月爲燭兼爲友        밝은 달로 촛불하고 벗을 겸해
白雲鋪席因作屛        흰구름 자리 펴고 이로서 병풍도 치네
竹竹밑賴松濤俱蕭凉    대 바람소리 솔나무 물결이 모두 서늘하니
淸寒瑩骨心肝惺        맑고 차가와 뼈에 형철하고 마음과 간장을 깨우네
惟許白雲明月爲二客    오직 흰구름 밝은달만 두 손님 되는 것을 허락하니
道人座上此爲勝        도인의 자리위엔 이것이 승勝이 되누나

<소>
1)신神 이면서 승勝을 겸한 것을 말한 것이며 신이 어째서 신이 되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혼자 마시니 신인데 백운과 명월 이 두 객은 신이 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또한 나와 백운 명월 두 객 그래서 셋인데 어째서 취라 하지는 않고 승이라 할까 백운 명월은 흔히 같이 오지 않고 교대로 운감차 월간차가 되어오니 같이 오면 나타났다가 가리워 졌다가 해서 아취가 좀 번거로워 지지 않을까.

(飮茶之法 客衆則喧 喧則雅趣索然 獨 曰神 二客曰勝 三四曰趣 五六曰泛 七八曰施也)
차 마시는 법은 객이 많으면 소란하니 소란하면 아취가 삭연해진다
홀로 마심을 신神이라 말하고 둘이를 승勝이라 말하고 서넛은 취趣 대여섯은 덤덤히 범泛이라 말하고 칠팔은 그저 시차施茶라 말한다

<소>
1)황산곡집에, 품차에는 한사람은 신을 얻고 둘은 취를 얻으며 세사람은 맛을 얻고 예닐곱사람은 이는 시차라 이름한다. 했는데 장원 차록에는, 음차에는 객이 적은 것을 귀히하니 무리지으면 시끄럽고 시끄러우면 아취가 결핍해 홀로 마심을 유幽라 말하고 두 객을 승이라 말하며 서넛을 취라 말하며 대여섯을 범汎이라 말하며 예닐곱을 시施라 말한다. 했으니 여기서도 두 객이라고 되어 주인외에 두사람으로 해석할수 있다.
2) 아무래도 사람의 남에게 나가는 입보다는 자신에게 들어가는 입이 솔직하다 할수있다 잘 먹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차가 속인들이 맛을 알기에는 마땅치 않은 물건이기에라고 만은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비록 요새 차가 많이 마셔진다고 하지만 아직 음료개발이 선전과 수요환경에 비해 따르지 못하는지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차를 스스로 즐겨 찾는 경우보다 소비용도가 단지 접대용 시차로 주로 쓰여지고 있는 같다 물론 외국차도 잘 쓰이지 않는 걸보면 아직 명차茗茶가 차지하는 비중이 여타음료 보다 더 깊게 뿌리내려 정착된 습관성 음료로서 길들여지지는 못한 같고 또 식생활 풍토에 따른 차이도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굳이 입을 차에 길들이려고만 할게 아니라 우리 풍토에 맞는 차를 개발해야 되겠고 게다가 보관방법과 유통과정 그리고 다리고 우리는 법도 따라 잘 맞추기 못하면 차맛의 요행은 바라기 어려운 것이 될것이고 단지 약삼아 일부 찾고 접대나 무얼 한다는 의례로 차려 시차해질 뿐이고 그나마 주니 생각해 대접하는 걸로 알고 마실따름이겠다.

-------艸衣新試綠香煙 禽舌初
-------纖穀雨前 莫數丹山雲澗
-------月 滿鍾雷笑可延年
-----------白坡居士題
초의가 새로 녹향연을 시차試茶하니 새혓바닥 처음 여린 것이 곡우 앞에 것이라 단산의 운감월 월간월을 헤지 말라 종지 가득 뇌소차가 수명을 늘일수있다.
백파거사가 제하다.

<소>
1) 초의의 스승이고 동차의 부흥조라 할 차산이 죽자 초의가 바로 이를 잇는듯 동차송을 짓게 되는데 전하는 동차송의 몇본중에 백파거사가 제한 이 시를 말미에 실은 본이 있으니 단락을 뛰워 앞의 송과 구별하고 주註도 없다 앞의 송을 읽고 참고한듯 녹향 곡우전 운간월등의 낱말을 평면적으로 나열하는데 그친듯하고 운감 명월이 곧 초의차 안에 있음을 몰라 차에 대해 깊이했던 이의 글 같진 않지만 이는 또한 사람들이 모를 만 하지 않은가 초의의 동차송이 짧아 아쉽다는 듯이 동차가 장수식품으로 연년하는 제일이라고 이른바 건강식품이라는 류의 물건에 흔히 하는 말처럼 덤덤히 이어 놓은 듯하지만 이 역시 나름의 동차를 평한 말이다 혹 동차송의 구성형식이 해거도인에게 드리는 글인데 백파의 한수를 뒤에 단다는 것은 초의가 처음부터 해거도인등이 읽어 보고 한구절 보태길 바랬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초의가 새로 뇌소를 시차한 것이 앞의 동차송에서 뇌소를 스스로 이바지한다고 한것과 완당김공제문에서 추사와 뇌협 설수를 같이 기울여 마셨다는 것처럼 혹 초의가 제주에서 다 같이 객이 되어 마신다는 뜻이라면 몰라도 만구지의 원전대로 객을 대하는 뇌소차의 의미로 제주까지 가져가서 같이 마셨다고 한것은 아닐 것이고 또한 동차송에서 객에게 대한다고 한 자용향이 자색이니 자신에 이바지하는 뇌소차는 녹향이란 말이겠다 천리마의 꼬리에 붙게 된 것을 것을 굳이 안된다 무겁다해서 자르기보다는 다만 알고 이도 참고하게 됨이 더 좋을듯하여 같이 실어둔다 백파거사는 신헌구申獻求(1823-?)로서 자는 계문季文으로 승지의 벼슬을 했으며 초의시고에 쓴 발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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