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道美學

東茶記

무진공방주얼리 2006. 2. 10. 00:53

동차기명우자역주(東茶記茗虞子譯注)

(茗虞注:초의의 동차송에 東茶記라는 것이 언급되었으나 그 구체적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고 일전의 1991년 말부터 東茶記라는것이 한 월간 차잡지에 소개된 적이 있다 한다 이제 비록 간접으로나마 그 글을 구해 여기 싣고 역주를 하는데 아직 원본을 보고 정해진 글은 아니다)

<東茶記 >
(茗虞: 처음 원본에는 작자에 대해 달리 나와있지는 않은 같고 다만 전의이(全義李)라고 돼있다한다 한편 초의 동차송에 인용해 나오는 東茶記라는 것에 대해 여태 제가의 설이 모두 다산의 저서라고 소개 되어있으나 가만보면 이는 어디에 근거해 나온 주장인지는 모르겠다)

布帛菽粟 土地之所生 而自有常數者也 不在於官 必在於民 少取則國用不足 多取則民生倒懸
베와 비단 콩,조는 토지에서 나는 바로 스스로 일정한 수량이 있는 것으로 관에 있지 않고 백성에게 있음이니 적게 취하면 나라의 쓰임에 부족하고 많이 취하면 민생이 거꾸로 매달리게 된다
金銀珠玉 山澤之所産 而孕於厥初 有減而無增者也
금, 은, 구슬과 옥은 산과 못의 소산으로 그 처음에서 배태해 나와 감하는것은 있어도 더 증가하는 것이 아니다
觀於秦漢 賞賜黃金 率以百千斤爲槪
진나라 한나라 때를 보면 상주어 하사에는 황금을 써 비율이 대략 백,천근으로 하였다
至於宋明之際 白金以兩討 古今之貧富 於斯見矣
송나라 명나라때에 이르러 백금을 냥으로 계산했으니 옛과 지금의 가난과 부가 여기서 보인다
今有非布帛菽粟之爲民所天 金銀珠玉之爲國所富
지금 베,비단,콩,조의 백성이 하늘로 여기는 바가 아니고 금,은,주,옥의 나라가 부로 여기는 바도 아닌것으로
得於荒園隙地 自開自落之間 草木可以禪國家裕民生 則何可以事在財利 而莫之言也
거친동산의 틈, 스스로 열리고 스스로 떨어지는 사이에서 얻어 초목이 가히 국가를 禪하고 민생을 裕한다면 어찌 가히 이로 財利에 이바지 하면서 말하지 않을수 있으랴
茶者 南方之嘉木也 花於秋 而芽於冬 芽之嫩者曰雀舌,鳥嘴 其老者曰茗
차란 남방의 가목이다 가을에 꽃하고 겨울에 싹나 싹의 여린것을 작설,조취라 말하고 그 늙은 것을 명이라 말한다
(명우: 작설은 차가 처음 싹나 아직 잎이 펴지지 않은 바늘 같은 꼴을 두고 참새의 혀와 같다 해서 작설,조취라고 부르는 이름이 비롯된 것이고 茗은 특히 잎이 퍼진 늙은 것을 가리킨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작설은 특히 우리나라에서 차나무 차를 말하는 일반명사로 쓰였으며 茗 또한 특히 의가에서는 차가 원래 쓴냉이를 말하는 것과 구별하여 차나무의 것을 말하는 일반명사로 쓰이고 있다)

著於神農 例於周官 降自魏秦浸盛歷唐至宋 人巧漸臻 天下之味 莫尙焉 而天下亦無不飮茶之國
신농에서 부터 드러나고 주관에 열거 되었으며 위나라 진나라에서 부터 내려와 점점 성해 당을 거쳐 송에 이르러 인공의 교묘가 점차 달려져 천하의 맛이 더 숭상할수없이 되어 천하에 또한 차를 마시지 않는 나라가 없다
北虜最遠於茶鄕 嗜茶者 無如北虜 以其長時肉 背熱不堪故也
북쪽오랑케가 가장 차향茶鄕에서 멀지만 차를 좋아하는 자가 북쪽오랑케 만함도 없다 그 장기간 고기로 인해 등에 열이 감당치 못하는 까닭이다
由是 宋之撫遼夏 明之撫三關 皆以是而爲之餌
이로 말미암아 송나라가 요나라와 서하를 무마하고 명나라가 세관문밖의 오랑케를 대함이 모두 이로 먹이했다
我東産茶之邑 遍於湖嶺載
우리 동쪽의 차가 나는 읍이 호남과 염남에 두루 실리고
中國之茶 生於越絶島萬里之外 然猶取而富國禦戎之貨
중국차가 월주와 절해고도의 만리밖에 나는데 오히려 취해 부국하고 적을 막는 재화로 하나
我東則産於籬階 視若土灰無用之物 幷與其名而忘之 作茶說一篇 條例茶事于左 以爲當局者 建白措施之云爾
우리 동국은 울타리,계단에서 나지만 보기가 마치 재흙의 무용지물로 하고 아울러 그 이름과 함께 잊어 버리니 茶說 한편을 지어  茶事를 왼쪽에 조례해 이로 당국자가 건의해 아뢰어 조치해 시행으로 삼는다 운운

一 茶有雨前 雨後之名 雨前者 雀舌是已 雨後者 卽茗也. 茶之爲物 早芽而晩茁 故穀雨時茶葉未長 須至小滿芒種 方能茁大 自臘後至雨前 自雨後至芒種 皆可採取 或以葉之大小爲眞至別者 豈九方相馬之偏也
하나, 차는 우전과 우후의 이름이 있어 우전차란 작설차가 이것이다 우후차란 곧 명(茗)이다 차의 물건됨이 일찍 싹나 늦게 줄뻗는다 그러기에 곡우때는 차잎이 자라지 않아 모름지기 소만과 망종에라야 능히 크게 뻗는다 납월에서 우전에 이르기까지와 우후에서 망종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채취할수있는데 혹 잎의 크고 작음으로 참으로 삼아 구별에 이르는 자가 있음은 어찌 九方으로 말을 보는것의 치우침하랴
(명우: 차따기를 구분하는 법은 대체로 날자와 트는 싹의 형태 이 두가지로 나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우전,우후 이런 날자구분 보다 작설이라해서 형태로 구분하는 방법을 취해왔는데 여기서는 날자로 구분하는방법을 우선한 것이다 그러나 시일로 구분하는것은 지역에 따라 같은날이라도 트는 정도가 다르며 같은 장소에서도 해마다 싹트는 날이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제일 큰 문제가 있다 다만 먼저 돋은 것만 차로 쓸만하다는 것은 말대로 치우쳐 바람직하지 못할수있다)

一 茶有一槍一旗之稱 槍則枝 而旗則葉也 苦謂一葉之外不堪採 則荊州玉泉寺茶 以大如掌 爲稀奇之物 凡草木之始生一葉 大於一葉 漸成其大 豈有一葉頓長如掌乎 且見舶茶 莖有數寸長 葉有四五連綴者 蓋一槍者 謂初茁一槍一旗者 謂一枝之葉也 此後枝上生枝 則始不堪用矣
하나, 차에는 일창일기의 일컬음이 있다 槍은 곧 가지고 旗는 잎이다 실로 한잎일때 외에는 따기 감당치 않다고 할것 같으면 형주 옥천사의 차는 크기가 손바닥만 하여 드물고 기이한 물건이 되었으니 무릇 초목이 비로소 한낲나서 한닢에서 크져 점차 그 큼을 이루니 어찌 한닢이 갑자기 손바닥만히 자랐으랴 또 선박의 차를 보면 줄기가 몇치 길고 잎이 너댓개 연이은 것이 모두 하나의 창이다 처음 뻗은 일창일기라 이르는 것은 한가지의 잎을 이름이다 이후에 가지위에 가지가 생기면 비로소 감당에 쓰이지 못한다
(명우:이백의 시에 나오는 선인장차는 한잎이 선인장 같다는 말이 아니고 가공한 차떡이 손바닥만하다는 말인데 미처 이점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혹 차의 연구에서 아직 초기에 초고적 성격으로 쓴 것 같음이 아니라면 차산의 글로서는 좀 의아한 점이 있는 것이다)

一 茶有苦口師,晩甘候之號 又有以天下甘者無如茶 謂甘草 茶之苦 則夫人皆能言之 茶之甘 則謂嗜之者之說 近因採取 嘗諸葉 獨茶以舌之 有苦淡蜜水漬遇者 始信古人命物之意非苟也 茶是冬靑 十月間液氣方盛 將以禦冬故葉面之甘尤 然意欲此時採取煎膏 不拘雨前,雨後 而未果然煎膏 實東人之臆料硬做者味苦只堪藥用矣. (倭國香茶膏 當以別論 我東所造 最鹵莽)
하나, 차에는 고구사,만감후라는 호가 있고 또 천하에 단것은 차같음이 없다해서 감초라고도 이른다 차의 쓴것이라면 사람마다 모두 말할수있다 차의 단것이면 기호하는자의 설이다 근래 채취로 인해 여러잎을 맛보는데 홀로 차를 이로 혀대어 쓰고 담함이 있어 꿀물로 담군것을 만남이 있음은 비로소 옛사람의 물건에 이름한 뜻이 구차하지 않음을 믿느다 차는 겨울에 푸른것으로 시월달에 액의 기가 막 성해 장차 이로 겨울을 나기에 잎면의 달기가 더욱하다 그러나 생각에 이때 채취해 다려 고아 우전, 우후에 구애되지 않을 것이나 과연 다려 고지는 않았다 실로 동쪽사람의 억지로 굳게 만드는 자는 맛이 쓰 단지 약용에 감당할 뿐이다(왜국의 향차고는 당연히 따로 논하고 우리 동쪽의 만드는 바는 가장 거칠고 멋대로다)
(명우: 차로 膏를 만드는 데는 겨울것이 나을수있지 않은가 하는 설이다)

一 古人云 墨色須黑 茶色須白 色之白者 謂餠茶之入香藥造成者 月兎龍鳳團之屬 是也 宋之諸賢所賦餠茶 而玉川七椀 則乃葉茶 葉茶之功效己大 餠茶不過以味香爲勝 且前丁後蔡 以此招譏 則不必求其法 而造成者也
하나, 고인이 이르길 먹색은 모름지기 검고 차색은 모름지기 희야한다했다 색의 흰것은 떡차의 향약을 넣어 조성한 것을 말한다 월토,용봉단의 속함이 이것이다 송나라 여러 현자의 사부에서 나오는 병차인데 당나라 옥천의 칠완이면 이는 엽차로서 엽차의 공효가 이미 큰데 병차는 맛과 향으로 나은것에 불과핟 또 앞에 정위 뒤에 채양이 이어 이로 꾸지람을 불렀음인즉 반드시 그 법을 구하여 조성한 것은 아니다
(명우:이 역시 차산의 글로서는 의아한 착오가 있다 채양이 비난을 들은 것은 차를 잘못만들어서가 아니라 너무 극품을 만들어 정사를 받들어 펴는 대신으로서 어찌 그런것으로 위에 맞추는데 힘쓰느냐는 뜻이었다)

一 茶之味 黃魯直詠茶詞 可謂盡之矣 餠茶以香藥合成 後用渠輪硏末入湯 是一味 似非葉茶之比 然玉川子 兩腋習習淸風生 則何嘗用香藥助味哉 唐人亦有用薑鹽者 坡公所而向時一貴家宴席用蜜和茶 而進一席 讚頌不容口 眞所謂鄕態沃蜜者也 正堪撥去吳中守陸子羽祠堂
하나, 차의 맛은 황노직이 읇은 차의 시사가 가히 다했다고 할수있다 병차는 향약香藥으로 합성해 뒤에 약연에 갈아 가루해 탕에 넣으니 이 일미는 엽차와 비교할것은 아닌듯하다 그러나 옥천자의 양 겨드랑이에 살살 청풍이 생긴즉 어찌 일찌기 향약으로 조미한 것이랴 당나라사람도 생강과 소금을 쓴자가 있어 소동파공이 일전에 한 부귀가의 연석에 꿀을 써 차에 고루어 한 자리에 내니 입에 들이지 못한다 찬송하였으니 참으로 소위 鄕態의 꿀을 부은 것이다 정히 오 지역 안에 육우사당을 빼내는데 감당한다  
(명우: 송나라 황산곡은 가장 차를 많이 읊은 문사다 비록 용봉단은 아니지만 당나라때에도 우리거나 그냥 삶는 명나라때 같은 엽차는 아니고 가루차를 삶는 것이었다
그리고 단맛을 내기 위해 찻물에 소금을 첨가한 사람은 이미 다성이라는 육우부터이라 하며 뒤에 소금을 넣지 않게 됨은 그것도 순수한 차맛을 지키기 위해서라기 보다 의설에 의하면 자극이 신장에 바로 들어 해롭다는것이다 차맛을 지키기 위해 다른것을 가미하는 것을 배격하기 시작한 것은 송나라때 채양무렵부터가 본격적이라 할수있다  그러나 이것도 또 명나라때 와서는 병단차 자체가 가공된 것으로 엽차에 비해 순수한 차맛이 아니라는 주장이지만 결국 보면 소금이나 꿀 대신 맛이 여린 극세품의 차싹을 가지고 가공 변질시키거나 묽게 우려내어 마실뿐이니 이 모두 업어치나 메치나 마찬가지며 오히려 차의 본질에서 멀어진 비난은 피차 피할수 없다고도 할수있으니 이를 두고 너무 말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어쨌거나 꿀과 단맛내는 효용이 비슷한 설탕을 가미하는 일은 옛날에도 더러 있었고 차에 꿀을 넣는 것에 대해서 의가의 설은 구체적으로 찾지는 못했지만 한편 이는 굳이 가타부타 말할만한 사안이 아니었기에 그럴수 있고 지금 서양의 홍차에 설탕을 타기도 하는 것 처럼 앞에 향태鄕態라고 말한대로 이미 민간에서 더러 그렇게 음료해 왔던 것으로 보이며 한편 차의 전신이 되는 쓴냉이(상추)는 꿀에 넣지 않는다는 당나라 손사막의 의설醫說이 있다 그러나 후세 의가의 다른 설에 의하면 지금 쓴냉이를 꿀에 절여 먹는 사람들이 많으나 해를 입는 것은 보지 못한다했다)

一 茶之效 或疑東茶不及越産 以余觀之 色香氣味 少無差異 茶書云 六安茶以味勝 蒙山茶以藥勝 東茶蓋兼之矣 若有李贊皇陸子羽 其人則必以余言爲然也
하나, 차의 효능은 혹 동차를 의심하여 월주산품에 미치지 못하는가하지만 내 관점으로는 색과 향 기미가 조금도 차가 없다 다서에 이르길 육안차는 맛으로 낫고 몽산차는 약으로 낫다하나 동차는 대체로 겸했다 만약 이찬황과 육우가 있으면 그 사람인즉 반드시 내말로 그렇가 하리라
(명우:동차송에는 이구절을 인용하여 "만약 이찬황 육자우가 있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내 말로서 그렇다 하리라"라고 했는데 여기는 則자가 하나 더 있어 "그 사람이면 반드시 내말로서 그렇다 하리라"가 되어 동차가 몽산약 육안맛을 겸했다는 평에 대해 이론異論이 많았다는 듯이 암시되고 있다")

一 余於癸亥春 過尙古堂 飮遼陽士人任某所寄茶 而葉小無槍 想是樵所謂聞雷而採者也 時方春三月 庭花未謝 主人設席 松下相對 傍置茶爐 爐罐皆古器 各盡一杯 適有老患感者 主人命飮數杯曰 是可以療感氣 去今四十餘年 其後舶茶來人 又以泄痢之當劑 今余所採者 非但試寒暑感氣,食滯,酒肉毒胸腹痛 皆效 泄痢澁欲成淋者之有效 則以其利水道故也 疾者之無頭疼 有時截愈 則以其淸頭目故也. 最後病者 初一二日熱 數椀而病遂已 病日久 而不得發汗者 飮輒得汗 則古今人之所未論 而余所親驗者也
하나, 내가 계해년 봄에 상고당을 지나다가 요양遼陽의 사인士人 임아무개가 준 바의 차를 마셨는데 잎이 작고 창이 없어 생각에 이는 孫樵가 소위 말하는 우레를 듣고 딴것이라는 것 같았다 때는 막 춘삼월로 정원의 꽃은 지지 않았는데 주인은 자리를 베풀고 솔아래 서로 대해 겿에는 차화로를 두고 화로와 다관은 모두 옛그릇으로 각자 한잔을 다했다 마침 노인이 감기를 우환하는자 있어 주인이 몇잔 마시라하여 말하길, 이는 가히 감기를 치료한다했다 지금으로 사십여년이다 그뒤 선박의 차에 온 사람이 또 설사 이질에 마땅한 약제라 하고 지금 내가 딴 것은 비단 차고 더위의 감기에 시험함이 아니라 식체,주육에 가슴에 독하고 복통에 시험함에 모두 효험하고 설사해 이질하고 껄꺼로움에 淋을 이루려는 자의 유효함은 그 水道에 이로움인 까닭이다 질병자의 두통이 없이 때로 씻은듯 나음은 그 두목을 맑히는 까닭이다 최후로, 병하는 자가 처음 하루 이틀 열남에 몇사발에 병이 드디어 그치고 병이 날이 오래어 땀을 내지못하는 자는 마시면 바로 땀을 얻음은 고금의 사람이 논하지 못한 바로 내가 친히 경험한 것이다
(명우:이글의 작자가 정약용일 경우 계해년은 정약용이 마흔두살때인 1803년이 된다 이로서 사십년 뒤이면 1843년인데 정약용의 생몰은 1762-1836년이니 상고당에서 차를 마신 이글의 작자는 차산이 아니게 되며 호남에서 직접 차를 따본 사람이 된다
상고당은 조선후기 골동수장과 감상가로 알려진 김광수(1696~?)의 택호로 보여지는데 그러면 계해년은 1743년의 계해년으로 보인다 여기서 사십년 뒤이면 1783년 계묘년이 되는 것이다 작자의 출신성명이 구체적으로 나와있지 않고 글이 큰 깊이나 수식은 없이 간솔하고 조례의 형식을 갖춘데다 남북으로 교제와 견문이 있는 같은 것이 실무와 관계된 중인출신의 海商과 가능성이 있지 않은 가 한다)

一 余傾濁酒數杯後 見傍有冷茶 漫飮半杯入睡 痰卽盛 唾出十餘日 始益信冷則反能聚痰之說 聞漂人來到也 於甁中瀉出勸客 豈非冷者耶 又聞北譯徐宗望之食兒猪灸也 一手持小壺 且且飮必是冷茶也 想食熱之後 冷亦不能作
하나, 내가 탁주 몇잔을 기울인뒤 곁에 냉차가 있음을 보고 멋대로 반잔 마시고 잤는데 담이 바로 성해 십여일을 뱉아 내고 비로소 차면 도리어 담을 모은다는 설을 더욱 믿게 되었다 표류인이 래도한 것을 듣고 병속에 것을 쏟아 내어 객에게 권하니 어찌 냉한 것이 아니랴 또 듣기를 북쪽 역관 서종망의 새기돼지구이를 먹음에 한손에 작은 호를 쥐고 차차로 마신다는 것은 반드시 냉차리라 생각칸데 뜨거운 것을 먹은 뒤엔 냉한것도 지어지지 않음이라
(명우:차의 약성은 냉한하다는 것인데 그러나 이는 특히 진한 가루차로 먹게 될때를 말하는 것이다 특히 쓴 차를 마시고 치를 떨면 곧 추워 살을 떠는 것과 다를바 없게 됨을 알수있다 그래서 가루차 시절에는 특히 냉차를 꺼렸다 지금 우려마시는 묽은 차는 이에 비해 그리 구애하지 않으나 무었보다 자기 몸에 맞춰 쓸 필요가 있다)

一 茶能使人小睡 惑終夜不得交睫 讀書者,勤紡績者 飮之可謂一助 禪定者 亦不可小是
하나, 차는 능히 사람으로 잠을 적게 하여 혹 밤새도록 눈꺼풀이 서로 닿지 못하게 한다 독서하는 자와 길쌈하는자는 마시면 가히 일조 한다 선정하는자도 또한 이를 작게 여기지 못한다

一 茶之生 多在山中多石處 聞嶺南則家邊竹林處處有之 竹間之茶尤有效 亦可於節晩後採得 以其不見日故也
하나, 차의 나는 것이 흠히 산속 돌많은 곳에 있다 듣기로 영남이면 집곁의 대숲에 곳곳에 있어 대나무 사이의 차는 더욱 효능있고 또한 가히 계절이 늦은 뒤 채취해 얻을수있으니 그 햇볕을 보지 않는 까닭이다
(명우: 여기서 이제 대숲속에 나는 竹間茶라 하여 나타나고 있는 것인데 조선말 이유원의 임하필기 권32 호남사종이란 항목에 보면 강진 보림사의 竹田茶는 열수 정약용이 得하였다 했으니 이 또한 본문과 사정이 다른 것이다 한편 대숲차는 이때까지도 물론이지만 이전의 말차음용습관에 따라 기미가 여리고 순한 싹을 내기 위해 그늘을 씌우기도 하는데서 비롯하는 것으로 우려 마시는 잎차에서는 사정이 다를수있다)

一 茶之採 宜於雨餘 以其嫩淨故也 坡詩云 細雨足時茶戶喜 ○按文獻通考 採茶之時 縣官親自入山 使民之老幼男女 偏山披求 採綴蒸焙 先以首採而精者爲貢茶 其次爲官茶 餘則許民自取 蓋茶利甚大 有關國家如此
하나, 차의 땀에는 비온 나머지가 마땅하다 그 여리고 깨끗한 까닭이다 동파시에 이르길 가는비가 족한 뒤에 茶戶가 기뻐한다 하였다
문헌통고에 감안해보면 차딸때는 고을의 관리가 직접 산에 들어가 백성이 늙고 어리고 남자 여자 산에 깔려 구하니 따서 짜 찌고 배화하는데 먼저 맏물 따 精한 것을 공납차로 하고 그 다음은 관리차 다음 이면 백성이 스스로 취하게 하니 대체로 그 이익이 심히 커 국가와 관련됨이 이 같다
(명우: 갈수기에 비가 오면 여리고 부드러운 차싹이 일시에 쑥 돋으니 차를 따는 입장에서는 좋아했겠으나 그러나 혹 가루차도 아니면서 맛에 있어서는 일률적으로 말할수없다 더구나 많은비는)

一 茶書又有片甲者 早春,黃茶 而舶茶之來 擧國稱以黃茶 然其槍旗已長 決非早春採者 未知當時漂來人 果得傳名如此否 有自黑山來者言 丁酉冬 漂海人指兒茶樹 謂之黃茶云 兒茶者(俗謂兒求茶) 圻內所謂黃梅也 黃梅花黃 先杜鵑發 葉有三角 如山字形有三 莖葉皆帶薑味 峽人之入山也 包飽而食 各邑取其嫩枝煎烹以待使客 且其枝截取二握 爲主材如藥 煎服則感氣傷寒及無名之疾 彌留樹日者 無不發汗神效 豈亦一種別茶耶
하나, 다서에 또 편갑, 조춘,황차란 것이 있어 선박의 차가 오면 온나라에서 황차라 일컫는다 그러나 그 창과 기가 이미 자라 절대 조춘에 딴 것이 아니다 알수없다 당시 표류해 온 사람이 과연 이름을 전함이 이 같았음인지 흑산도로 부터 온 사람이 있어 말하길 정유년 겨울 표류인이 아차나무(兒茶樹)를 가리켜 황차나무라 했다 한다 아차라는 것은 (세간에서 아구차라 이른다) 서울지역에서 이르는 소위 황매다 황매의 꽃은 누렇고 참꽃보다 먼저 핀다 잎에는 삼각이 있어 山자 모양같이 세개가 있다 줄기와 잎이 모두 생강맛이 있다 골짝사람이 산에 듬에 싸서 먹는데 각 읍에는 그 여린 가지를 취해 다려 삶아 이로 사신과 객을 대하며 또 그 가지를 잘라 두 줌을 취해 약과 같이 쓰니 다려 복용하면 감기와 상한 및 무명의 질병이 더욱 며칠 머무른 것이 땀흘려 신효하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또한 일종의 別茶인가
(명우: 조선후기 조재삼(1808-1866)의 송남잡지에, 해남에 옛날엔 황차가 있었는데 세상에 아는 자가 없고 오직 정약용이 알기에 정차라 이름하고 또 南茶라 한다.(海南古有黃茶 世無知者 惟丁若鏞知之 故名丁茶又南茶)하였으니 송나라때의 차서에 차의 찌거나 삶은 것을 황차라 한다하였는데 이로보면 이미 고려시대부터 황차라는 이름이 전해진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산야에 노란꽃이 앞서 피어 황매화라고도 일컫는 생강나무(三木+亞杓樟)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별차라는 것은 지금 대용차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인게 된다
한편 당시 우리차를 작설차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수입되는 차를 황차라고 불렀는데 이는 중국에서는 대체로 명나라 이후 특히 강남의 관목차 산지에서는 볶은 초차炒茶가 많이 쓰였으나 멀리 외지로 수송하는 차는 대개 가공형태가 찐 것으로 청나라때 티벳 몽고 등지로 수송되던 운남의 보이차나 호남의 천량차와 같이 찐 황차였다 보이차는 벽돌형태로 지고 운반에 편리하게 가공되었고 천량차는 우리의 죽부인 같은 죽루(竹<蔞-艸+竹>) 안에 담은 차의 무게가 천냥(37.3kg)이 나가기에 천냥차인데 이로 말이나 낙타등에 두어덩이씩 싣고 멀리 수송하는 편리에서 비롯된 것이니 이런 차는 지금분류로 말한다면 자연히 홍차(흑차)에 속하게 된다)  

출처: 네이버블로그 도빈학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