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의 산다
출처:네이버블로그 도빈학당
차산 정약용의 산차山茶(동백)
정약용의 아언각비 권1 산다 조목에 보면,
"山茶者 南方之嘉木也
酉陽雜俎云 山茶高者丈餘 花大盈寸 色如絲+非 十二月開
本草云 山茶産南方 葉頗似茶 而厚有稜
深冬開花
蘇軾詩云 葉厚有犀角健 花深少態鶴頭丹
又曰,
爛紅如火 雪中開
余在康津於茶山之中 多在山茶 雖其花品少態 誠如子瞻之言
葉旣冬靑 花亦冬榮 尤其實多瓣相合 略似檳 以之搾油 塗髮不 婦人貴之 亦嘉卉也 東人忽以山茶 名之曰冬柏 其春榮者 謂之春柏 大芚寺多茶樹 名曰長春洞
嘗閱長春洞詩卷 或稱翠栢 或稱叢栢 卒無山茶二字 可嘆也已 (陳氏花鏡 一名曼陀花 恐非) 漢淸文鑑 謂之岡桐.
산차라는 것은 남방의 가목嘉木이다
유양잡조에 이르길, 산차는 높은 것은 한길남짓하고 꽃크기가 한치에 찬다 색이 붉은비단 같고 십이월에 핀다.
본초에 이르길, 산차는
남방에 나는데 잎이 자못 차 비슷하고 두껍고 야물며 서슬있고 깊은 겨울에 개화한다.
소식시에 이르길, 잎이 뚜껍고 서슬있어 무소뿔의
튼튼함이 있다 꽃은 깊고 젊은태가 있으며 학머리의 붉음이다.
또 말하길,
흐드러진 붉음이 불같고 눈 속에 핀다.
내가 강진의
차산 가운데 있을 때 산차가 많이 있었다 비록 그 화품花品이 젊은태로 실로 소자첨의 말과 같았으나 잎이 이미 겨울에도 푸르고 꽃 또한 겨울에
영화한다 더우기 그 열매가 꽃판이 많아 서로 합해 대략 빈랑檳 나무 같으며 이로 착유해 모발에 바르면 끈적이지 않아 부인이 귀히하니 또한
가훼嘉卉다 동쪽사람이 홀연히 산차를 동백이라 이름하고 그 봄에 영화하는 것은 춘백이라 이른다 대둔사에 차나무가 많아 장춘동이라 이름해 말한다
일찌기 장춘동시권을 열람하니 혹 취백翠栢이라 일컫고 혹 총백叢栢 이라 일컬으며 끝내 산차라는 두 글자가 없었다 가히 탄식할만할 뿐이다
(진씨화경에 일명 만다라꽃이라 하니 아닌듯하다) 한청문감에는 강동岡桐이라 일렀다"
라고 했는데 본초강목 목부제36권의 산차 조목에 보면,
"山茶/산차.
(석명) 시진이 말하니, 그잎이 차와 유사하고 음료를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차의 이름을 얻었다.
(집해) 시진이
말하니, 산차는 남방에 난다 수생樹生해서 높은 것은 한길 남짓하며 가지와 줄기가 서로 엇갈려 더한다 잎은 자못 차잎 비슷하고 두텁고 야물며
서슬있다 가운데는 넓고 끝은 뾰족하며 윗면은 녹색에 뒷면은 묽다 깊은 겨울에 꽃피고 붉은 꽃잎에 누런 꽃술이다.
주정왕의 구황본초에
이르기를 산차는 여린잎을 데쳐 익혀서 물에 일어 먹을수있으며 또한 찌고 볕쬐어 음료를 만들수있다.
꽃.
(주치)피를 토하고 코피
흘리며 장에 바람으로 하혈하는데 모두 붉은것으로 가루해 애기 오줌에 넣어 생강즙과 술로 고루어 복용하면 울금을 대신
할수있다.(진형)
탕불과 불에 상한데 가루해서 삼씨 기름에 고루어 바른다.(시진)
열매.
(주치)부인이 머리기름기를 내는데에
가루해 섞는다.(시진.적현방)"
위에 쪄서 볕 쬐 만든다는 것은 산차가 교목이 되어 역시 초차보다 잎이 더 두껍고 질긴 성질이 강해 볶아 불발효차로 우리기보다 역시 교목차처럼 찌고 발효시키는데 더 마땅하기에 그런가 여길수도 있지만 혹은 본초강목의 명茗에 관한 기록을 보아도 내용이 별반 다른 것이 없는 만큼 명때에 적힌 본초강목은 역시 명때에야 유행한 포차법 이전의 처방을 정리해 실은 까닭일수 있다 정약용의 여유당보유 아언지하 편에도 보면,
"산차는 동백이 된다 유양잡조에 이르길, 산차는 높은 것은 한길남짓하고 꽃의 크기가 한치 꽉차고 색이 붉은 비단색이며 십이월에 개화한다.했으며 본초에 이르길, 산차는 남방에 나는데 잎은 차 비슷하고 두껍고 야물며 서슬있고 깊은겨울에 개화한다.하고 소식시에, 잎이 두터우며 무소가죽의 튼튼함에 꽃은 깊고 어린태 나며 학머리의 붉은색이라 했으며 또 말하길 흐드러지게 붉음이 불같고 눈속에 핀다."
했는데 역시 조선후기의 식산 이만부의 지행록에 보면 산차와 중국 절강성의 차라는 뜻의 절차를 말하면서 산차 즉 지금 흔히 동백이라 불러 통하는 것을 역시 차나무에도 교목과 관목의 다른 종류가 있듯 마치 같은 차나무의 한 종류로 보고있는듯이 말하고 있다 동백과 차는 같은과의 식물로 모양과 열매 잎등이 비슷한데 다만 꽃이 붉은것도 있고 가을에 피는 차와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봄에 꽃핀다 그러나 이것이 떡갈나무의 도토리나 참나무의 꿀밤처럼 같이 묵이 되어 맛과 효능이 다를 게 없는지는 혹은 어떤 낫고 못한 다른점이 있는지 아직 맛본 바도 들은 바도 없으니 아직 알 수 없지만 강진(금릉)의 차신계에서 만들었던 금릉월산차月山茶가 강진 월악산의 차로서 산차로 만든 것인지 까지는 확실치 않고 또 차산의 경세유표에 나오는 차마무역안에 관한 글을 보면,
"案 南方諸縣 (山茶)極美 臣以所見 海南康津靈巖長興 凡沿南諸邑 莫不産茶 (臣謂凡産茶之山) 令地方官封植 禁民樵牧 待其茂盛 歲以茶幾斤 輸于林衡
送于滿河省 以市良馬 頒于牧場 亦足以膽國用也 (經世遺表 卷2 冬官工曹 第六 事官之屬)
감안컨데, 남방 여러 현의 산에 차(여러 현縣의
산차)의 맛이 극히 아름답습니다 신이 보는 바로는 해남 강진 영암 장흥 등 무릇 바닷가로 연한 고을은 차가 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신이
이르건데 무릇 차가 나는 산은 지방관으로 하여금 봉해 심도록하고 백성들이 나무하고 목축하는 것을 금지하여 그것이 무성해지기 기다려 해마다 차
몇근을 임형시林衡寺(*산의 임목을 관장하는 관청)에 보내어 그 차를 만하성滿河省에 보내 좋은 말을 사다가 목장에 내려주면 또한 나라의 쓰임을
담당하기에 족할 것입니다."
여기서 산차가 동백을 두고 말한 것인지 혹 뒤에 "신이 이르건데 무릇 차가 나는 산은"이라는 문투처럼 산에 있는 차를 말한 것인지 확실치 않은데 그러나 옛 사람들이 차를 분류하는 것이 지금 학명으로 분류된 것과는 다 같지 않은 것이고 산차 또한 차와 같은 과의 식물로서 모양과 쓰임이 같은 바가있어 적어도 포함해 말한 것은 분명하다 혹 동백이 차보다 먼저 차음료로 쓰인 것은 아닌가 한다 삼국사기에 흥덕왕이전에도 차가 있었다는 것은 혹 이를 말하는지 모르겠다 참고로 하륜(1347-1416)의 불훼루기를 보면,
"社有山茶樹 蔭于一庭 前朝忠烈王 駐輦于此 賜號將軍 父老相傳 以爲美談 余昔少年爲客 時方仲春 山茶盛開 留賞半日 猶以爲未足
금강사에
산차山茶나무가 있어 한 뜰을 그늘 지운다 전조의 충렬왕이 연輦을 여기 세우고 장군이라 호를 내렸으니 부노들이 서로 전하며 미담으로 여겼다 내가
예전 소년에 객이 되었는데 때마침 중춘仲春이라 산차나무가 무성히 피었다 머물러 감상하기 반나절이나 오히려 족하지 못했다"
했으니 중춘에 꽃피었다는 것으로 보아 역시 동백임을 알 수 있다 충렬왕은 당시 정동군征東軍의 출정을 전송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인데 일제때
발간된 김해읍지에는 고을의 금강곡에서 황차가 나는데 일명 장군차라 한다 하니 이는 바로 산차를 쪄서 제조한 차일 것으로 역시 찌고 발효시키는
차종류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차의 찐 것을 황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