關於包種茶史考,可供參考的文獻無多,因爲包種茶的興起,僅百數十年之事。我人硏究包種茶的製造方法,與烏龍茶之製造法相去不遠,自粗製以至精製各種過程,雖有若干處理之差別,但技術處理可謂大同小異,由此可知包種茶之製造係脫胎自烏龍茶,是無須疑問的。 포종차
역사의 고찰에 관해 참고자료는 별로 없다 포종차의 흥기가 근 백수십년의 일로 우리가 연구한 포종차의 제조방법과 오룡차의 제조 방법은 거리가 멀지
않고 조제품에서 정제품에 이르기까지 각종 과정에 비록 약간의 처리 차이가 있으나 단 기술처리가 대동소이하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데 포종차의 제조가
오룡차로 부터 탈태해온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알수있다
這樣亦可明白包種茶之製造方法仍然取法自福建。武夷岩茶與安溪鐵觀音的製法與品質,與其說是和臺灣烏龍茶相像,無如說是和臺灣包種茶更爲接近。祇是福建在甚麻時候開始有包種茶的名稱,沒有正確文獻記錄可資參考。據日人井上房邦氏調査報告,包種茶的製造,係距今百二十餘年前,係福建省泉州府安溪縣業茶者王義程氏所創製,由他倡導並傳授製法。此種茶葉製成後,用方紙二張內外相襯,放茶四兩包成長方形之「四方包」,包外蓋以茶名及頭印章,稱之爲「包種」,或運往福州加實香花包出售,或經由廈門直接運銷南洋。此應爲包種茶製造之開始,亦卽包種茶稱謂之由來,惜確實年代無可稽。 이런것은
또한 명백히 포종차의 제조방법이 그대로 복건에 취해져 무이암차와 안계철관음의 제조와 품질이 대만 오룡차와 서로 비슷하다는 말처럼 대만 포종차와
더욱 접근된다는 말이나 다르지 않다 다만 복건은 어느때 포종차라는 명칭이 시작되었는지 정확한 참고문헌자료가 없다 일본인
정상방방씨의 조사보고에 의하면 포종차제조가 백이십여년전 복건성 천주부 안계현의 차업자 왕의정씨가 창제한 바로 그의 창도와 제법전수로 말미암는다
한다 이런 종류의 차를 만든후 네모난 종이 두장 내외를 깔고 차 넉량을 싸 장방형의 사방포를 이루어 포장의 바깥두껑에
차이름과 두인을 찍어 "포종"이라 일컫고 혹 복주에 운송해 꽃향을 채우고 싸내어 팔고 혹 하문을 경유해 직접 남양에 운송해 소비하니 이것이
포종차의 개시가 되어 또한 바로 포종차의 일컬음의 유래가 되나 아깝게도 실제 년대는 계고하지
못한다.
臺灣從事包種茶的製造,據考許多文獻所載均說係始自淸代同治十二年(1873)。蓋以當時臺灣之烏龍茶,遭受世界茶業不景氣影響,再加以臺北當時專製烏龍茶出口之五家洋行,認爲臺灣茶價昻貴,無利可圖,乃一致中止收購,致使烏龍茶有行無市,陷於慘境。其後烏龍茶市況,日見衰退,大有「無人問津」一脈不振之勢。此對臺灣茶業之發展,顯有莫大之打擊。亦卽淸代臺灣烏龍茶遭受厄運時期。 대만이
포종차의 제조에 종사함은 허다한 문헌을 고찰해 보면 청대의 동치12년부터다 대개 당시의 오룡차가 세계차업의 불경기 영향을 받고 다시 대북에서
전문적으로 오룡차를 만들어 출구한 오가양행이 대만 차값이 앙귀하여 이익을 도모할수 없다 여겨 수매중지에 일치해 오룡차가 있어도 매매가 없게해
참경에 빠졌으니 이후로 오룡차 시황이 날로 쇠퇴해 크게, 묻는 사람이 없게 되어 맥이 떨치지 못하는 형세가 되었다 이로 대만 차업의 발전에
현저한 타격이 되었으며 또한 바로 청대 대만 오룡차가 액운을 받은 시기가
되었다
當時臺北一般茶商,鑑於烏龍茶之市況,自五家洋行中止收購以後,景氣日衰,迫不得已,卽將臺北一帶滯銷之烏龍茶,大部人+分裝運福州,悉數改製包種茶,當時在福州通稱爲「花香茶」。此固爲臺灣烏龍茶改製包種茶之由來,亦實爲臺灣從事製造包種茶之先聲。 당시의
대북에 일반상인이 오룡차 시장현황을 거울삼아 오가양행이 수매 중지후 경기가 날로 쇠하여 절박 부득이 대북일대 체적되는 오룡차를 대부분 복주에
포장 운송해 모두 포종차로 고쳐 만들었으니 당시 복주에서는 "화향차"라 일컬었다 이것이 실로 대만 오룡차가 포종차로 고쳐 만들어진 유래며 또한
실로 대만에서 포종차의 제조에 종사하게된
先聲이다
迨至光緖七年(1881),有福建省泉州芬安縣茶商吳福源氏(許多文獻稱為吳福老),因感到在福建改製包種茶獲利不多,他爲圖厚利起見,遂帶同技術工作人員渡臺,在臺北設源隆號專事製造包種茶;同時還有同府安溪縣商人工安定及張古魁兩人合夥組設建成號,亦經營包種茶。 광서칠년에
이르러 복건성 천주부 동안현의 오복원씨가 복건에서 포종차로 고쳐 만든느 것이 이익이 많지 않다여겨 많은 이익을 도모해서 기술자를 대동하고
대만으로 와 대북에 원륭이라는 이름으로 포종차제조를 시작하는동시에 같은 천주부의 안계현 상인 공안정과 장고괴 두사람이 합해 "건성"을 설립해
또한 포종차를 경영했다
...........................
到了民國十九(公元1930)年前後,全省各産茶區域,皆能製造包種茶,産量逐年增加,輸出數量且可凌駕烏龍茶之上。因此期中,日本佔領我國東北數省,包種茶之市場除南洋一帶外,有東北廣大市場,是以産量輸出遂年增多。本省光復後,烏龍茶大有「壽終正寢」之勢,而此臺灣第二種特色茶---包種茶,仍然可以「穩紮穩打」保持原有的大部분市場,雖然每年輸出量比不上全盛時間那樣的鉅額,但亦沒有像烏龍茶那般的慘淡,至少每年尙可以維持一百萬公斤以上的輸出量。而且包種茶每年在本省的消費量比其他茶種的數字亦較鉅大。因爲本省居民多數喜飮包種茶。是以包種茶在本省光復後沒有像紅茶或綠茶的一時走紅,確實타是固步自封在走타原有的道路,雖不興旺,卻也不是到了慘敗地步。 1930년
전후에 이르면 전지역의 각기 차가 나는 지구가 능히 포종차를 제조하게 되어 산량이 매년 증가 되었고 수출량도 오룡차 위로 능가하게 되었다 이
기간안에 일본이 중국의 동북 몇성을 점령하게 되어 포종차 시장이 남양일대를 제외하고도 동북의 광대한 시장이 있게 되었다 이로써 산량과 수출이
증가했다 본 대만성이 광복후에는 오룡차는 크게 수명을 고하는 형세가 되었고 대만의 제2 특색차인 포종차는 그대로 가만가만 원래있던 시장 대부분을
보유하여 비록 수출량이 전성시대 처럼 그렇게 거액은 아니나 다만 도한 오룡차와 같이 그런 참담도 없어 매년 적어도 백만키로 이상의 수출량을
유지하는데 이러렀다 이래서 포종차는 대만성 광복후에 홍차나 녹차 같은 일시 성쇠없이 확실히 자기 스스로의 길을 확고히 걸어 나갈수잇게 되어 비록
흥왕도 없지만 도리어 참패의 지경에 이르지도 않았다
*이미 무이암차가 나무마다 종류별로 채취한 잎을 백지에 싼데서 포종이란 이름의
비롯을 짐작할수 있을것이나 이로 보면 결국 대만에서 오룡차가 몰락한 계기로 이를 떨이로 보따리 싸서 복건으로 가져가 화향차로 되만든데서
포종의 직접 뜻을 살펴 볼수있고 마찬가지로 차츰 대만에서 포종차가 오룡차를 대신하게 된 것이데 어쨌거나 이렇게 지금 대만은 일본의 녹차처럼
포종차를 특화해 우리나라에 오는 고산오룡이니 하는 대만차는 거의 포종차(향료차)로 알고 있으며 오룡차 또한 복건 본지의 원래 오룡차 제법과는
차이가 있기 마련이어 원래의 홍차에서 소위 청차라하여 삼홍칠록의 푸른잎과 붉은 잎이 서로 섞이게 만드는 것을 대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참고로 향료차는 가미차와 마찬가지로 아무래도 북경,만주, 서양등의 차산지가 아닌 곳에서 더 쓰여온 경향이
있다
차제조법 같음에는 근래 비교적 정밀해 졌다 (장차 차딸때 진흙화로의 쇠솥에 열탕을 끓여
대바구니에 쪄 그 잎이 부드러워지기 기다려 취해 내고 대자리에 깔고 부채질해 열기를 가신뒤 쇠선반에 종이를 발라 부뚜막위에 홍배한다 배화에 따라
유념해 잎이 말리고 몸이 마르면 다시 체질해 거칠고 세밀을 나눠 내고 줄기를 가려내어 번복해 배화해 말린뒤 상자에 포장해 운송한다 무릇 곡우
전후 딴 것은 두춘차가 되고 잎이 살찌고 부드러우며 맛이 농후하고 하지전후는 차춘차가 되어 잎이 늙고 맛이 박하며 대서 전후 딴 것은 尾春차가
되어 매년 출산이 두춘은 육분,차춘은 삼푼, 미춘은 일푼을 차지한다고 한다)
우치제宇治製라는 것이 있고, (삼본가빈위라는 자가
있어 서경인인데 강호에서 차를 팔았으며 四世의 가빈위때에 이르렀다 원문3년<1738> 산성영곡종칠랑이 스스로 일종의 색이 좋은 차를
만들어 산본씨에게 납품하니 산본씨가 그 奇雅함을 품상하고 더불어 계약해 다시 제조하게 하니 당시 영주들이 맛보고 천상 지하에 제일이라는 이름이
있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산본씨의 이름이 크게 떠들석해지고 우치제라 이름했다)
옥로제玉露製라는 것이 있어 더욱 이름을
떨친다 (천보년간에 산본씨가 이미 큰이익을 획하고는 우치,철희 간에 모두 열여덟 곳의 다원이 있었는데 육세가빈위에 이르러 호를 덕옹이라
했는데 우치에서 소창촌에 이르러 목하길좌위문의 집에 묵으며 배차할때 장난쳐 손으로 차잎을 문질러 고루기 경단구슬 같이 하니 목하씨가 걱정했다
덕옹은 그 상태가 기이해지는 것으로 여겨 중가로 사서 다시 많이 만들게해 강호로 지녀 와 이름해 "옥로"라 했다 사람들이 다투어 구입하니 당시
한근값이 은 사십오전인데 이래로 점차 앙귀해져 칠십오전에 이르렀다) 그 제조가 좀 거친 것은 번차番茶라 말한다 거친재료가 많고 제조도
더욱 거칠어 겨우 햇볕에 말릴뿐이다 하총, 상륙 간에 많이 있다)
부순 가루를 분차粉茶라 하는데 근년이래 홍차제조를
배우고 (명치7년<1874> 권업료勸業寮에서 "홍차제법"이란 책을 만들어 내어 여러 부와 현에
반포하니 민간에 비로소 제조를 배우는 자가 있게 되었다 명치8년 상해영사관이 특별히 우리나라사람 둘을
초빙해 비후산 산록과 풍후의 목포 등지에서 제조를 배우게 했으나 그 법을 얻지는 못했는데 또 위원 다전원길을 파견해 호복,강서,안휘 등의 곳으로
가게해 재배와 제조의 여러법을 학습하며 아울러 좋은 종자를 찾아 구매해 지녀 왔다 그후 일본의 삼정은행과 한 서양 상인이 또 중국인 사십여명을
청해 들여 근강의 대진군에서 제조해 처음엔 자못 법 같았으나 뒤에는 제조가 과다해 이익을 얻지 못한다 한다)
또 전차石+專茶를 배워
만들어, (처음 명치9년 다전원길이 중국의 호북,함녕과 한구 등의 곳으로 유력할때 지녀 돌아온 전차가 드디어 권업료
안의 녹차 분말로 기계 압착해 본떠 제조 했으나 견실하지를 못햇고 10년에 원길이 다시 강남과 복건에
들어가 그 기계를 본떠 가지고 돌아왔으며 11년 전권공사 가본무양이 러시아의 동부 육로를 통해 돌아오며 러시아 사람이 평소 벽돌차를 좋아 마시는
것을 듣고 몇종을 구매해 지녀 왓다 11년에 이르자 원길과 상림웅차랑이 또 법대로 제조해 미국 상인에게 주고 차상인 전천씨
라는 사람 또한 그 법을 전해 러시아 사람이 드디어 더불어 약정해 구매하게 되었다 한다)
또 인도차를 배워
만드는자 있어, (인도에서 차를 심음은 1834년에 비롯되어 지금 오십여년이다 먼저는 어느 후작이 정부에 글을 올려 그 의논을 수창하니
영국이 그 말을 받아 들여 드디어 영국인과 인도인 십삼명을 가려 위원으로 했다 인도의 아삭석 주州에는 예전에 차가 있었는데 인도가 영국 판도에
들지 않았을 당시 1824년 버마의 역이 있을때 군함장관이 그 땅을 순찰하다가 같이 차종자를 지니고와 그 나라에 보고했다 이에 이르러
위원을 아삭석주에 파견해 먼저 몇개의 차묘포장을 설치하고 아울러 작은 제조장을 열고 37년에 이르러 문득 제조와 배화의 여러 법에 통하고 또
위원을 중국의 복건,하문 등지로 보내 종자를 구매해 심어 점차 동북의 여러 주에 이르게 되었다 그후 정부는 중국 차종을 이식하는 것이 편하다는
결의를 하게 되어 또 안휘, 항주, 영파, 복건의 무이산 등지로 가서 좋은 종자를 찾아 구매해 서북의 여러주에 심었다 이후 연구의 공교 졸렬이
금상을 걸고 다투게 되었고 식물가가 또한 나무의 佳否와 토질의 마땅, 일일히 중국의 배화법을 연구 의론하고 정부가 아울러 그 글을 택해 대중에게
포고하니 무릇 차심는 땅이 비록 절역의 심산에 있으나 정부가 모두 도로를 개통하여 운송에 편리하게 하고 인민이 역시 다투어 스스로 분발해 더욱
좋은법을 구하고 기계로 도우니 1869년에 이르러는 인도차의 이름이 드디어 세계에 떠들석하게 되었다 지금 인도의 근년 수출하는 차를 파악해 보면
매년 이미 삼천일백만 파운드를 넘고 판매가가 천삼백만원으로 산출이 불과 중국의 팔분의 일이다 그러나 차값의 높이가 거의 중국의 배에 달한다
일본은 명치7년 부터 부전동삼을 상항으로 파견해 동인도를 경유하며 그 차의 아름다움을 듣고 명치9년에 이르러 드디어 다전원길을 제법시찰위원으로
파견하고 석천정룡을 기계시찰위원으로 하고 매포정일을 상무위원으로 해 모두 인도로 가서그 법을 연구하니 돌아옴에 이르러 드디어 고지현 아래 생차를
취해 인도제법으로 제조하니 과연 서양인의 기호에 맞아 이에 장차 그 법을 두루 각 부와 현에 고하고 아울러 전습장傳習場을 설치하여 수업자가
오백여명에 이른다 한다)
일본에 나는 차가 전국에 널렸으나 우치차가 가장 양호하다
개항이전에는 오직 중국 상인이 장기에서 구주차를 구입해 나라에 돌아와 다시 제조해 양상洋商의 쓰임에 채웠고 또 화란의 상인이 차나무 오백본을
가지고 와 조와에 이식했으나 서양인으로 차를 구입하는자 없었다 안정6년<1859>에 이르러 횡빈이 개항하고 미국 상인이 비로소 조금씩
구입했다 이때 차 일백근이 육칠원에 불과했으나 (겨우 당시 十二三方의 일푼 은으로 일푼 은을 구입할수 있었으니 가치는 영국 은
반원半圓이다)
뒤에 더하여 십육칠원에 이른다 그 뒤 수출액이 따라 더해지고 재배가 더욱 성해져 명치 이삼년에 이르러 마침 중국
홍차가 위조하는 것이 있어 미국인이 싫어하는 바가 되었고 일본 녹차가 기회를 틈타 팔렸다 명치 11년에 이르면 수출이 이천팔백여만근의 많음에
이르며 미국에 파는 것이 십분의 구요 영국에 파는것이 십분의 일이다 그러나 제조가 좀 넘쳐 이익이 도리어 미약해 져 정부가 해마다 법을 정해
보호하게 되며 명치 12년에는 공진회를 열어 무릇 출품하는 자는 팔백사십여섯 집으로 천백칠십이품인데 위원을 특선해 그 형상과, (검은
옻칠반에 차잎을 채우고 책상밖에 햇볕을 비치게 장치하고 이로 차잎의 장단,긴소,신축의 여하를 감별한다 )
색택, (유리창 밖에
색가리개를 설치해 햇볕이 들게하고 그대로 흑칠반에 차잎을 채워그 색택과 枯燥, 純靑, 碧黃, 박잡 등의 일을
가린다)
수색, (차잎의 무게가 팔푼으로 차호에 놓고 열탕을 부어 오본 시간뒤에 그 액즙을 기울여 내어 순백 차잔 안에 주입해
이로 그 청탁과 누렇고 푸른 것을 살핀다)
차찌끼, (장차 차찌기를 흰잔에 기울여 넣어 맑은 물을 붓고 그 형상의 세심히 살펴
다른 물질의 혼합유무가 없는가 살핀다)
향, (앞에 법과 같이 차액을 우려 내어 입에 머금어 씹어 이로 그 향의 강약을
가린다)
맛, (역시 앞에 법대로 맛의 달고 미끄러움 쓰고 떫음 여하를 가린다)
수장, (곧 차잎의 향미
색택으로 이로 그 수장해 보호하는 것의 잘,못을 살펴 정한다)
가격, (곧 이해의 차값으로서 이로 높고 낮음을
판별한다)
성질, (매 고을의 구역마다 품질을 구별해 이로 그 땅의 마땅함과 물건의 성질을
고찰한다)
원가, (각 집의 출품인이 신고한 글에 의해 그 공역 비용의 다과를 살피고 이로 그 값을 살펴
정한다)
이렇게 팔등으로 분별해 이로 우열을 정하는데그 우수한 것은 상패를 주어 백성이 분발해 다투어 나간다 그 호농豪農과 富商이
스스로 다원을 심어 오십여 정町의 넓음을 열어 제조액이 이만여근의 많음이 있어 이전에 비해 크게 나아간 경지라 한다 (명치12년 이미
차제조를 열고 공진회의 권농국장으로 다시 차업을 힘쓰는자 있어 말하길, "현재 상태로서 앞의 오는 형세를 감안하면 일본차가 비록 점차
개척해 채우나 그 이익은 실로 믿을게 못된다 우려할만한 것이 여섯있으니, 땅의 광대 물건의 풍요가 중국 인도는 우리가 미칠바가 못되니 이게
하나요 이 두나라의 수출의 많음과 가격의 높음이 우리가 미칠바 못되니 둘이요 홍차의 기염이 전세계를 압도하여 높이는 자가 열에 팔로
가령 미국이 기호를 옮겨 홍차를 추중해 나가면 우리의 녹차는 장차 버려짐이 흙덩이 헌신짝 같아질 것이니 셋이요 커피 이 한 물건이 미국인이
이로 음료 함이 실로 수위를 차지하여 그대로 차를 뺏음이 넷이요 인도정부가 차생산 이 한업에 온 정신을 쏟아 이로 나아가는 지경으로 그
그칠 바닥을 모르니 바로 금일 논하는 인도 차값이 우뚝 특립해 여러나라 위로 높이 나오는 것은 그 효과를 이미 목도하고 있음이
다섯이다 중국의 차업에 종사하는 자가 인도에 비해 비록 세거리 양보하나 그 정부 또한 주의해 보호한적이 없다 그러나 상인이 능히 힘써
마음을 같이 해 상호 연락하며 이로 쫓아 기계로 일해 근래 더욱 묵은 폐단을 바로 잡아 정밀 양호한데로 고쳐 도모하여 이로 영국 미국 러시아
오스트레일리아 각국으로 판매의 길을 넓힘이 여섯이다 지금 차생산이 단지 중국 인도 일본 세나라로 그러나 차의 물건됨이 비록 온대에 나기는
해도 실은 열대에 마땅한 것으로 가령 다른날 차생산이 더욱 넓어져 또 제2의 인도세계가 출현할지는 또한 알수없으니 역시 생각않을수 없다 지금
상업의 힘씀은 만국이 경쟁하는데 이같이 큰 적이 있고 이같은 중요한 일이 있으니 어찌 일본의 생산차로 하늘의 장점하는 바가 되고 나라의 특산으로
삼아 편안히 앉아 안일하게 거처해 도모하랴 이 하늘이 준 것을 보유하고 이 특산을 향유하기 기하는 것은 우리 백성의 수단에 있으니 무었을
수단이라 이르는가 관민이 일심으로 협동해 실험으로 실효를 징험하고 스스로 제조 배양해 무역에 이르니실로 이익이 있으면 급히 일으켜 이로 도모하며
정진해 그치지 않아 재화는 좋고 가격은 싸도록 힘쓰는 것분으 다른 방법이 없으면 그 가능을 바랄수 있다" 일본은 통상이래 각 통로에 임한
여러 사람이 오로지해 물산 증식으로 국익을 일으키는 것을 힘쓰니 이에서 가히 그 대강을 볼수있다 그래서 여기에 부록한다)
2005.7.26 소식문집 권70 사마광이 차와 먹을 논함을 적음에 이르길, 사마온공이 일찌기 말하길 차정茶政과 묵정은 상반되니
차는 희려하고 먹은 검으려하고 차는 무겁게 하려하고 먹은 가볍게 하려하며 차는 새로우려하고 먹은 묵으려 하오 나는 말하길, 두 물건의 질이 실로
그러하오 그런데 또한 같은 것도 있소 공이 말하길, 무었을 이르는 것이오? 내가 말하길, 기차奇茶와 妙墨은 모두 향나니 이는 그 덕이 같음이요
모두 굳으니 이는 그 지조가 같음이요 현인군자에 비유한다면 이쁘고 추하며 검고 흼이 부동해도 그 덕조의 품어 간직함이 실은 다를바 없음이요 공은
웃고 그렇다 여겼다 원우5년 시월 26일 순로,전옹,원지,돈부, 소식이 같이 남병사에 놀았다 절의 중 겸선사가 기명을 내었는데 옥설과 같았다
마침 삼구의 채희의 아들이 모여 만든 바의 먹물을 퍼 내었는데 검기가 옻칠 같았다 먹은 그 검으려 하고 차는 그 희려하는데 사물은 전轉하여
뒤바뀌어 전도顚倒 하니 어느것이 옳은지 모른다 대중이 한번 웃고 가다 (蘇軾文集 卷七十 記溫公論茶墨云 司馬溫公嘗曰
茶與墨政相反 茶欲白 墨欲黑 茶欲重 墨欲輕 茶欲新 墨欲陳 予曰 二物之質誠然 然亦有同者 公曰 謂何 予曰 奇茶妙墨皆香 是其德同也 皆堅 是其操同也
譬如賢人君子 姸醜黔晳之不同 其德操韞藏 實無以異 公笑以爲是 元祐五年十月二十六日 醇老 全翁 元之 敦夫 子瞻 同游南屛寺 寺僧謙出奇茗如玉雪
適會三衢蔡熙之子王<稻-禾>出所造墨 黑如漆 墨欲其黑 茶欲其白 物轉顚倒 未知孰是 大衆一笑而去)
역시 하얀 말차를 귀히 치던
당시의 음속에 따라 유행하던 가루로 연자해 덩이한 편단차片團茶를 두고 한 말이다 그래서 차가 무겁고 야물려 한다고 한 것이다 아마 굳혀 만들고
갈아 마시는 고형차의 제조법과 사용법은 제묵법과 마묵법에 역시 서로 비교 관련 되어진 것이다 그러나 불변하는 먹에 비해 차는 매우 변해 왔다
억센 종의 수액에서 이쁜 교동이나 가인으로 변모하듯 차가 술, 젖만이 아니라 먹의 흉내도 딴 것이다 당시 두사람은 차도 묵을수록 귀히 친다는
것은 전혀 있을수 없는 일로 생각했던 듯하다 마땅히 가 다닐 바도 없는 무료한 몸이 마음 또한 오랫동안 연묵을 멀리하다가 지금 짬으로 내어
벼루를 씻어 먹을 갈아 보는데 내 통론으로 말한다면 가는 먹물은 차가우려 하고 우리는 찻물은 따뜻하려 한다 할수있다 그리고 비록 차는 다른 향의
침습을 받음을 꺼린지만 문방의 생리가 먹을 면할수 없고 더우기 혹 용례상 그 먹과 차가 같이 분분하여 그 지란이 같이 분분하듯하지 못하리란 것은
알수없다 나는 또 말한다 먹은 불변하려하고 차는 잘 변하려 하는데 먹과 차는 같이 물들이어 먹은 실을 물들이는 것을 슬퍼했고 차는 갈변을
품었다고 (亦是從其貴鮮白末茶的當時流行茶飮之俗 謂之以石+展末作固式片團茶 故曰茶欲重且堅云 意其堅造而磨飮的固型茶製法與用法 是有關於與其製墨及磨墨法
而論其然 雖然較以不變之墨 茶多變來 與其始自頑僕之水厄 變遷于嬌童佳人 如此茶變非但酒乳 亦有抄取墨態 當時司蘇二人 茶亦愈陳愈貴
是幾爲不可想矣 無料無所往行之身 心亦久遠硯墨 今間出洗硯磨墨 我言以通論則磨墨之水欲冷 泡茶之水欲溫 又雖茶忌受襲他香 文房生理不可免墨 尤或用例上
不知其不可爲墨茶竝芬 似如芝蘭竝芬 我又言墨欲不變 茶欲善變 而墨茶同染 墨悲絲染 茶懷褐變)
군자 外華하나 그 실을 잃지 않는다 하물며 때가 그 몸을 빛내지 못할것 같으면 갈옷을 걸치고 그 도를 품는다 이것은 원래 신산
주옥의 나무요 三危 雲巖의 秘隱으로서 기암을 깃드는 곳으로 하고 채색노을을 호흡하여 몸은 紫舌의 종자가 되어 천신 지지地祗가 吸飮하고
仙聖의 滋味하던 品으로 인간에 널리 건질 것을 뜻 하여 오직 그 嘉를 따라 들임을 받아 따라 온 것이다 천품의 빼어난 바탕으로
염제법술의 훈화와 坤黃神功의 究境에 비록 밖으로 갈색을 걸치나 안으로 금옥을 품고 이로 良主와 佳客을 기다리는 奇寶로서 저 賤工의 녹차
간색의 졸렬이 헛되이 산을 더럽히고 멋대로 취한 물건이 되어 그 배움이 익지 않고 밖으로 꾸밈에 힘써 비록 총취함을 뺏아도 풋기를 면하지 못하고
안으로 眞味를 이루지 못하며 일견 그럴듯 의심스런 빛갈이 혹하여 進口하여 잘못 삼킴에 작으면 水厄의 무익으로 자리의 일 또한 쉬이 불편으로 젖고
크면 심지어 吐하여 敗局을 아뢰어 손님과 주인이 면목이 없게 하고 정신을 어지럽히고 몸에 해로운 것과 절대 같이 논하지 못한다 군자의
坤道에 있어 혹 이행하고 혹 光나며 혹 머금어 묶고 속으로 하여 오직 배합하는 덕에 따라 작게 쓰면 작고 크게 쓰면 크나 그
기량은 헤아릴수 없으며 역에 말하길 용이 野에서 싸우니 그 피가 검고 누렇다 했다 하늘은 검고 땅은 누러니 무늬의 뜻이 지대하다 전전긍긍 삼가
가볍게 보고 천히 쓰지 말며 또한 그 덕에 합하지 않으면 감히 쓰지 못한다 이에 褐聖이 進玉하는 茗의 讚을 삼운시로 지으니
克해 이 마심을 힘써 이 차를 다 하라! (君子外華而不失其實 況其時不彰其身 則披褐而懷其道矣 此者原是神山珠玕之樹 三危雲巖之秘隱 奇巖爲棲
彩霞爲吸 身爲紫舌之種 神祗吸飮 仙聖滋味之品 志於弘濟人間 唯其隨嘉受納帶歸 以天稟秀質 帝術薰化 坤黃神功之究境 雖外披褐而內懷金玉
以待良主佳客之奇寶也 于彼賤工綠間之劣 徒爲瀆山濫取之物 未熟其學 務飾外姸 雖奪蔥翠 未免生靑氣 內不成眞味 一似疑耀 惑之進口誤呑 小則水厄無益
座事亦易浸于不便 大則甚之吐告敗局 賓主無面目 而亂神害體者 絶不可同論 君子之於坤道 或履或光 或含括中 唯隨配德 小用則小 大用則大
而其量不可測 易曰龍戰于野 其血玄黃 天玄而地黃 文義至大 戰戰兢兢 愼勿輕見賤用 亦不合其德則不敢用 於是作褐聖進玉茗讚
以三韻之詩 克勉斯飮 窮盡斯茶哉!)
1921년 장희소의 장숙남유기에서, 무이에서 나는 차는 이름이 세계에 들려졌다 흙이 모래와 자갈이
섞여그 맥이 심히 척박하다 깊은 골에 처한 까닭에 햇볕을 적게 보고 비와 서리가 비교적 많다 그래서 차의 품이 佳하다 또 그 품종이 또한 스스로
특이한 것이 있어 차의 품류는 크게 네종으로 나뉘는데 小種이라 말하는 것은 그 최하로서 높이가 불과 한자남짓이다 九曲의 시내 두둑에 보이는
것이 모두 이것으로 또한 半岩茶라 일컫는다 값은 매 일원에 한근이다 茗種이라 말하는 것은 값이 소종의 배가 되고 奇種은 값이 또
배가 되어 오룡, 수선과 더불어 기종 등은 값이 서로 상동하여 매 한근에 사원이다 수선은 잎이 크고 맛이 청향이고 오룡은 잎이 가늘고 색이 검고
맛이 농하고 떫다 上奇種이라 말하는 것이면 모두 백년이상의 노수가 되어 이에 이르면 따로 명목을 세우고 가치도 기앙奇昻하니 대홍포 같음이
그 최상품이다 매년 거두는 天心岩의 것이 한근을 채우지 못하고 천유암 역시 열몇냥일뿐이다 무이산의 각 바위에 나는 차가 각기 그 특수한 품이
있어 천심암의 대홍포, 금쇄시
천유암의 대홍포, 인삼과,조금구,하수구,모후,류조 마두암의 백모란, 석국,철라한鐵羅漢,고과상 혜원암의
품석,금계반봉황,사설 뢰석암의 오주,벽석 지지암의 백계관 반룡암의 옥계, 일지향이 모두 극히 이름 나 귀하다 이 밖에
금관음,반천요,부지춘,야래향,랍천별 등등이 있어 명목이 궤탄 이상한데 통계가 모든산에 거의 천종에 달한다 차를 땀에는 모름지기 곡우절로
부터 열흘뒤에 따니 그 비대한 것을 취해 모름지기 천기가 청명할때 그 가종佳種을 따는데 먼저 명패를 차나무에 걸고 그 명목을 표한 다음 딸때는
흰종이에 차잎을 싸고 차의 명패 또한 동시에 따 안에 싸 넣는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차가 혼란해져 차공이 육우선생이 아닌데 어떻게 일일히 분별할
것인가 배화해 포장해 놓는것 또한 극히 연구한다 본년의 새차는 중추가 지나지 않으면 마시지 않고 이를 지나면 해를 넘길수록 더욱 좋아 또한
소흥의 좋은 술이 묵는것과 같은류다 적석과 성촌 두 거리가 하나는 산서에 있고 하나는 산동에 있는데(무이산의 서쪽 동쪽인듯)무이차를
파는자가 무리져 모여 실은 파는 것이 진짜 무이차는 십분의 이삼이고 그 칠팔은 모두 각 마을에서 온 것으로 멀리는 포성, 광풍,연산의 차로 또한
무이차라 일컫는다 무이차는 약성이 따뜻하고 맛은 짙어 극히 먹이를 소화하여 광동에 성행하는데 조주사람이 기호한다 조주땅은 낮고 습해 마심이
가장 마땅하다 조주인이 좋은 값으로 많이 재화해 금을 뿌려 아까와 않으니 무이암차가 드디어 교묘히 이름을 세워 멍에를 메워 상등함이다
**여기에는 나오지 않으나 장희소의 기행 이전에 천심암의 한 차나무가 폭우로 사태를 타고 내려와 이후 1919-1920년간에
천심사와 아래 뢰석사간에 수천원을 들인 소유권 분쟁의 재판으로까지 이어져 결국 도둑질한 것도 아니고 자연현상에 의한 것이라 해서 뢰석사의 소유로
결정났다는 수금귀(滴水金龜)라는 것도 있다 하니 이미 예전부터 무이암차의 중시를 볼수있다 오룡 대홍포는 물론 이고 비록 무이암차에 비해 안계차는
특히 저질이란 평도 있었거니와 한편 나한은 승려를 상징해 부처격인 관음에 비해 등급이 낮아 원래 철라한,금관음이 사리에도 맞다 아마 안계가
차시장이 되면서 무이의 철라한과 금관음에 힌트해 철관음이란 것을 만들어 선전해 팔게된 것으로 보이는데 어쨌거나 모두 크게는 무이차로서 처음 그
위치나 나무의 품종상태에 따라 구별해 불리워진 홍차일뿐이나 차츰 각기 차의 한 분류처럼 불리워지게 된 것이다 대렴이 차씨를 가져올때 이것저것
가마니 떼기로 따온 것을 뿌렸는지 몰라도 다경에서 육우가 말한 것처럼 내가 먼저 걸음에서 볼때 잎이 좁은것 넓은것 질긴것 부드러운것 더 쭈굴한것
등등 한바구니 안에서도 복잡하였다 생각에는 적어도 고급차를 만든다면 한데 훌섞인대로 그냥 잡탕으로 만들기보다는 비록 지금으로서 우열은
정할수없다해도 각기 특성을 알아 정선 특화하는게 마땅할 것이라 여겼다.
원명궁에서 막 정좌定坐하자 박박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음을 듣고 그 까닭을 물으니 도인이
말하길, 때는 저무는 봄에 이르러 공납이 가까왔습니다 산속사람이 몸소 차를 만듬이니 귀객에게 들릴바를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나가보니 큰솥
예닐곱개가 담장을 등지고 벌렸는데 담장 외벽의 아궁이에 몇사람이 그 속에 섶을 때고 있었다 솥이 치열해지자 큰삼태기로 부드러운차를 담아 안에
들이는데 두손을 합해 좌우로 흔들고 작대기나 젓가락 자루주걱을 쓰지 않았다 조금 지나자 연염烟焰이 실눈을 뜨게 하고 은은히 콩볶는소리(爆豆聲)가
나자 취해 대발위에 놓고 한사람은 유념하고 또 뿌리기를(手+柔且播) 면을 반죽해 덩이하는 같이 하여 즙이 잠잠히 배여 나와도 개의치 않아했다
그러고는 비단깁자루에 채워 발로 밟는데 왕복으로 유린해 삭삭(數數)하고 그침이 이같이 재번했다 열어보니 잎조각이 쭈구러들기
콩같이 되고 흰털이 송송했다 한근이 불과 너댓냥을 얻을뿐으로 곧 산중에서 소위 아작구鴉雀口라는 것이다......동자에게
마고천 샘물을 길러 나무꼭대기의 새로 딴 작설차를 이바지하게 하니 담벽색으로 향기가 농욱하고 입에 들자 무미無味한듯한데 조금 자나자 시원함이
생겨 혀뿌리가 간과諫果(감람나무열매,餘甘子)를 먹은듯하여 참으로 육우의 두겨드랑이에 바람이 생긴다는 것을 내세울것이
없었다
*청성산은 사천성 민산의 첫봉우리 산으로 추사가 말한 대장군수와 소장군수 라고 불리는 모란이 있었다는 청성산장인관이라는
도관道觀이 있는 산인데 어쨌거나 여기서도 명대 이후 유행한 솥에 볶아 가공하는 과배鍋焙 제법을 전하고 있다 이런 과배차는 일본에서도 중국식
차라는 뜻으로 당차唐茶라고 했고 또는 솥에 볶는차라는 의미로 지금은 주로 부초차釜炒茶라는 말로 나타내고있다 그런데 구한말 일본에 유학해온
안종수의 농정신편에도 보면 예전에도 과배차가 반드시 녹차는 아니었는데도 근래의 한일간에 이른바 부초차를 만드는 것이 녹차라는 임의적 유행의
대전제에 걸려 말은 볶는다(炒)고는 하지만 그 색을 살리고자 단지 미미한 솥불에 생잎을 뒤적여 덖어 말리는그냥 과배에 지나지 않는 것일뿐이고
더우기 이렇게 만들어지는데 따라 그 우려내는 것도 보면 밝은 금황색과 농욱한 향은 두고라도 쓰고 떫은 맛이 행여 우려날까해서 미지근한물에
씻어낼뿐이니 비록 쓰고 떫음은 면한다해도 역시 조미료 탄듯 밍밍한 맛의 수액水厄을 치룰뿐임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다 위의 글에서 비록 세심한
정성을 들여 특히 정선된 제품을 만드는 방법을 전하기 보다 보통 하는대로 하던 일을 말하는 것일뿐인듯하나 일전에 언제 거의 건빵이나 미숫가루색이
나도록 볶은 차를 보고 대게 미련하게 볶았는가 여겼는데 맛을 보니 문득 다른 향이 있어 불과 우리기를 잘 조절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추사가
초의의 차를 두고 한 말중에 탄맛을 지적하는 것이 있음은 바꿔 말하면 평소 역시 치열히 볶는데 더 가까웠으리라 짐작할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