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道美學

포종차

무진공방주얼리 2006. 2. 10. 01:05

출처:네이버블로그 도빈학당

2005.8.4

포종차의 역사

關於包種茶史考,可供參考的文獻無多,因爲包種茶的興起,僅百數十年之事。我人硏究包種茶的製造方法,與烏龍茶之製造法相去不遠,自粗製以至精製各種過程,雖有若干處理之差別,但技術處理可謂大同小異,由此可知包種茶之製造係脫胎自烏龍茶,是無須疑問的。
포종차 역사의 고찰에 관해 참고자료는 별로 없다 포종차의 흥기가 근 백수십년의 일로 우리가 연구한 포종차의 제조방법과 오룡차의 제조 방법은 거리가 멀지 않고 조제품에서 정제품에 이르기까지 각종 과정에 비록 약간의 처리 차이가 있으나 단 기술처리가 대동소이하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데 포종차의 제조가 오룡차로 부터 탈태해온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알수있다

這樣亦可明白包種茶之製造方法仍然取法自福建。武夷岩茶與安溪鐵觀音的製法與品質,與其說是和臺灣烏龍茶相像,無如說是和臺灣包種茶更爲接近。祇是福建在甚麻時候開始有包種茶的名稱,沒有正確文獻記錄可資參考。據日人井上房邦氏調査報告,包種茶的製造,係距今百二十餘年前,係福建省泉州府安溪縣業茶者王義程氏所創製,由他倡導並傳授製法。此種茶葉製成後,用方紙二張內外相襯,放茶四兩包成長方形之「四方包」,包外蓋以茶名及頭印章,稱之爲「包種」,或運往福州加實香花包出售,或經由廈門直接運銷南洋。此應爲包種茶製造之開始,亦卽包種茶稱謂之由來,惜確實年代無可稽。
이런것은 또한 명백히 포종차의 제조방법이 그대로 복건에 취해져 무이암차와 안계철관음의 제조와 품질이 대만 오룡차와 서로 비슷하다는 말처럼 대만 포종차와 더욱 접근된다는 말이나 다르지 않다 다만 복건은 어느때 포종차라는 명칭이 시작되었는지 정확한 참고문헌자료가 없다  일본인 정상방방씨의 조사보고에 의하면 포종차제조가 백이십여년전 복건성 천주부 안계현의 차업자 왕의정씨가 창제한 바로 그의 창도와 제법전수로 말미암는다 한다 이런 종류의 차를 만든후 네모난 종이 두장 내외를 깔고  차 넉량을 싸 장방형의 사방포를 이루어 포장의 바깥두껑에 차이름과 두인을 찍어 "포종"이라 일컫고 혹 복주에 운송해 꽃향을 채우고 싸내어 팔고 혹 하문을 경유해 직접 남양에 운송해 소비하니 이것이 포종차의 개시가 되어 또한 바로 포종차의 일컬음의 유래가 되나 아깝게도 실제 년대는 계고하지 못한다.

臺灣從事包種茶的製造,據考許多文獻所載均說係始自淸代同治十二年(1873)。蓋以當時臺灣之烏龍茶,遭受世界茶業不景氣影響,再加以臺北當時專製烏龍茶出口之五家洋行,認爲臺灣茶價昻貴,無利可圖,乃一致中止收購,致使烏龍茶有行無市,陷於慘境。其後烏龍茶市況,日見衰退,大有「無人問津」一脈不振之勢。此對臺灣茶業之發展,顯有莫大之打擊。亦卽淸代臺灣烏龍茶遭受厄運時期。
대만이 포종차의 제조에 종사함은 허다한 문헌을 고찰해 보면 청대의 동치12년부터다 대개 당시의 오룡차가 세계차업의 불경기 영향을 받고 다시 대북에서 전문적으로 오룡차를 만들어 출구한 오가양행이 대만 차값이 앙귀하여 이익을 도모할수 없다 여겨 수매중지에 일치해 오룡차가 있어도 매매가 없게해 참경에 빠졌으니 이후로 오룡차 시황이 날로 쇠퇴해 크게, 묻는 사람이 없게 되어 맥이 떨치지 못하는 형세가 되었다 이로 대만 차업의 발전에 현저한 타격이 되었으며 또한 바로 청대 대만 오룡차가 액운을 받은 시기가 되었다

當時臺北一般茶商,鑑於烏龍茶之市況,自五家洋行中止收購以後,景氣日衰,迫不得已,卽將臺北一帶滯銷之烏龍茶,大部人+分裝運福州,悉數改製包種茶,當時在福州通稱爲「花香茶」。此固爲臺灣烏龍茶改製包種茶之由來,亦實爲臺灣從事製造包種茶之先聲。
당시의 대북에 일반상인이 오룡차 시장현황을 거울삼아 오가양행이 수매 중지후 경기가 날로 쇠하여 절박 부득이 대북일대 체적되는 오룡차를 대부분 복주에 포장 운송해 모두 포종차로 고쳐 만들었으니 당시 복주에서는 "화향차"라 일컬었다 이것이 실로 대만 오룡차가 포종차로 고쳐 만들어진 유래며 또한 실로 대만에서 포종차의 제조에 종사하게된 先聲이다

迨至光緖七年(1881),有福建省泉州芬安縣茶商吳福源氏(許多文獻稱為吳福老),因感到在福建改製包種茶獲利不多,他爲圖厚利起見,遂帶同技術工作人員渡臺,在臺北設源隆號專事製造包種茶;同時還有同府安溪縣商人工安定及張古魁兩人合夥組設建成號,亦經營包種茶。
광서칠년에 이르러 복건성 천주부 동안현의 오복원씨가 복건에서 포종차로 고쳐 만든느 것이 이익이 많지 않다여겨 많은 이익을 도모해서 기술자를 대동하고 대만으로 와 대북에 원륭이라는 이름으로 포종차제조를 시작하는동시에 같은 천주부의 안계현 상인 공안정과 장고괴 두사람이 합해 "건성"을 설립해 또한 포종차를 경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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到了民國十九(公元1930)年前後,全省各産茶區域,皆能製造包種茶,産量逐年增加,輸出數量且可凌駕烏龍茶之上。因此期中,日本佔領我國東北數省,包種茶之市場除南洋一帶外,有東北廣大市場,是以産量輸出遂年增多。本省光復後,烏龍茶大有「壽終正寢」之勢,而此臺灣第二種特色茶---包種茶,仍然可以「穩紮穩打」保持原有的大部분市場,雖然每年輸出量比不上全盛時間那樣的鉅額,但亦沒有像烏龍茶那般的慘淡,至少每年尙可以維持一百萬公斤以上的輸出量。而且包種茶每年在本省的消費量比其他茶種的數字亦較鉅大。因爲本省居民多數喜飮包種茶。是以包種茶在本省光復後沒有像紅茶或綠茶的一時走紅,確實타是固步自封在走타原有的道路,雖不興旺,卻也不是到了慘敗地步。
1930년 전후에 이르면 전지역의 각기 차가 나는 지구가 능히 포종차를 제조하게 되어 산량이 매년 증가 되었고 수출량도 오룡차 위로 능가하게 되었다 이 기간안에 일본이 중국의 동북 몇성을 점령하게 되어 포종차 시장이 남양일대를 제외하고도 동북의 광대한 시장이 있게 되었다 이로써 산량과 수출이 증가했다 본 대만성이 광복후에는 오룡차는 크게 수명을 고하는 형세가 되었고 대만의 제2 특색차인 포종차는 그대로 가만가만 원래있던 시장 대부분을 보유하여 비록 수출량이 전성시대 처럼 그렇게 거액은 아니나 다만 도한 오룡차와 같이 그런 참담도 없어 매년 적어도 백만키로 이상의 수출량을 유지하는데 이러렀다 이래서 포종차는 대만성 광복후에 홍차나 녹차 같은 일시 성쇠없이 확실히 자기 스스로의 길을 확고히 걸어 나갈수잇게 되어 비록 흥왕도 없지만 도리어 참패의 지경에 이르지도 않았다

*이미 무이암차가 나무마다 종류별로 채취한 잎을 백지에 싼데서 포종이란 이름의 비롯을 짐작할수 있을것이나 이로 보면 결국 대만에서 오룡차가 몰락한 계기로 이를 떨이로 보따리 싸서 복건으로 가져가 화향차로 되만든데서 포종의 직접 뜻을 살펴 볼수있고 마찬가지로 차츰 대만에서 포종차가 오룡차를 대신하게 된 것이데 어쨌거나 이렇게 지금 대만은 일본의 녹차처럼 포종차를 특화해 우리나라에 오는 고산오룡이니 하는 대만차는 거의 포종차(향료차)로 알고 있으며 오룡차 또한 복건 본지의 원래 오룡차 제법과는 차이가 있기 마련이어 원래의 홍차에서 소위 청차라하여 삼홍칠록의 푸른잎과 붉은 잎이 서로 섞이게 만드는 것을 대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참고로 향료차는 가미차와 마찬가지로 아무래도 북경,만주, 서양등의 차산지가 아닌 곳에서 더 쓰여온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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