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道美學

유정량의 茶十德

무진공방주얼리 2006. 2. 10. 01:06

출처:네이버블로그 도빈학당

2005.8.17

당 유정량의 茶十德
1)以茶散鬱氣 / 차로 울울한 기를 흩고
2)以茶驅睡氣 / 차로 졸음기를 몰아 내고
3)以茶去病氣 / 차로 병기를 제거하고
4)以茶養生氣 / 차로 생기를 기르고
5)以茶利禮仁 / 차로 예와 인에 이롭게 하고
6)以茶表敬意 / 차로 경의를 표하고
7)以茶嘗滋味 / 차로 재미를 맛보고
8)以茶養身體 / 차로 신체를 기르고
9)以茶可行道 / 차로 가히 도를 행하고
10)以茶可雅志 / 차로 가히 志를 정아하게 한다

류정량劉貞亮은 당나라 말의 환관으로 본명은 구문진俱文珍인데 환관인 의부義父의 성을 따라 고친 것이다 구당서 열전 환관 편의 구문진 전에 의하면 성격이 충정 강직해 의를 무릅썼다 하며 순종이 즉위하고 바로 중풍으로 조정을 돌보지 못하게 되어 왕숙문 유종원 유우석 일당이 정무를 맡아 권세를 얻어 환관의 병권을 뺏으려 하니 아무도 감히 말을 못했는데 오직 유정량이 매번 건의해 더불어 다투었다 하며 모의해 광릉왕을 황태자로 책봉하도록 건의하고 마침내 선위하도록 해서 왕숙문 일당을 모조리 몰아내고 조정을 다시 구신舊臣에게 돌리는 공을 세우고 거듭 승진해 원화8년(813)에 졸했다
위의 글은 흔히 세간에 당 유정량의 글로 알려져 있긴하나 정확한 출전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근세 새로 발견된 문서인진 몰라도 다른 옛서적에 이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 보이지는 않는듯하고 문투가 옛글과는 좀 다른듯 한게 혹은 후세의 다른 유정량의 글이거나 칭탁 또는 다듬어진것이 아닌가 싶다 아뭏든 일단 소개해 자료제시를 할뿐이니 내용이나 출전에 대해서는 쓴대로 다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스스로 알아 이해 판단해 나가길 바라며 하나 의견을 낸다면 여기서 본문 아홉번째 行道한다는 말은 다른 앞뒤 여타 조목의 문맥으로 보아도 차가 道를 행하게 할수있는 촉매적 도구道具가 된다는 뜻으로 보는게 더 타당할 것이며 그리고 이 대목은 당대의 글로는 특히 의심스러운 구절이다 여기서 말하는 도가 구체적으로 어떤 도를 말하는지 몰라도 道를 행하는 행도와 도를 닦는 수도는 다르다 차로 가히 도를 닦는다고 하면 또 몰라도 차로 어떻게 하기에 도를 행하게 한단 말인가 차마시고 삼매경까지 늦도록 잠자지 않고 참선할수있는게 수도가 아니고 행도란 말안가 혹 송때의 차맛을 깨달음에 비유하여 차가 행하는 것을 도가 행하는 것에 비유삼던 승려의 글도 아니고 이미 당나라때의 환관의 사고로 쓴 글로는 더우기 이해하기어려운 표현인 것이다
노자에서 道가 道라고 가능한 것은 두루 통하는 도(常道)가 아니라 했거니와 동차송에서도 정精, 조燥, 결潔이면 다도는 다한다 말한대로 道의 여러뜻 중에 하나인 단지 방법을 말하는 醫道니 茶道니 書道, 武道하는 원래대로 뜻으로만 쓴다면 굳이 가타부타 하기보다 용어선택의 한 경우로 볼수도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다른 인문철학의 흔히 말하는 형이상적 道와 애매모호 두리뭉실 슬쩍 혼용해 실제는 단지 행다의 다예나 다법 茶技의 다도인 단지 차 해마시는 방법을 말할뿐이다가 필요하면 제 편한대로 유리한대로 밝히지도 않고 한 문장에서도 이것도 道 저것도 道하여 들숙날숙 무상출입하여 소위 다도위에 또 다시 무슨 다도의 정신이니하고 인간의 도덕철학적 길로 道해 끌어 써 수도의 도를 이미지를 팔아 노자의 말을 어기겠다면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참고로 유가와 불가, 환관파와 관리파가 대립하던 당나라말때 왕부의 차주론에 보면 차와 술이 서로 헐뜯어 서쪽을 道(言)하고 동쪽을 설한다 하여 술이 말하는 경우는 道라고 하고 차가 말하는 경우는 說이라 했으니 이는 설이 태언兌言 즉 서쪽의 말이란 뜻이되어 불교적 설교의 입장을 암시하고 있고 道는 동쪽 興起,興仁하는 유학적 교도敎道(導)의 입장임을 의식적으로 표현 한 것이다
이미 예기 소의少儀 편에 "道藝를 물어 말함에는, 자네는 무었무었을 습習하였는가 무었무었을 잘(善)하는가 라고 말한다"(問道藝曰 子習於某乎 子善於某乎) 했는데 이에 대한 주석에는 道는 어렵기에 익혔는가 묻고 藝는 쉽기에 잘하는가 라고 묻는 것이라 하였다 원래 일본에서 기능 기술적 방법에 까지 흔히 도라고 표현하는 것은 역시 당나라때부터 전해진 문물에 따라 쓰여온 속언적 어투로 보이는데 중국에서는 송대 이후 도학이 차츰 정립되면서 단지 아무것이나 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 아닌 따로 철학적인데로 의미를 부여해 나가게 되었으나 일본에서는 그대로 당대 어투가 쓰여오고 근래서야 이것이 다른 형이상의 인문철학적 道와 혼용을 일으키게 되고 심지어 이런 보다 고급적 개념의 도를 덮어 씌워 각색하고자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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