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道美學

고려 요일 걸퇴시

무진공방주얼리 2006. 2. 10. 00:51

이인로의 파한집 권중에서 명종의 대숙大叔으로 승통僧統을 지낸 요일寥一의 걸퇴시乞退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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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皇時 大叔僧統寥一 出入禁宇間 不問左右二十餘年 常(*嘗?)作乞退詩進呈云
명종황제때 명종의 숙부인 승통僧統 요일이 금중禁中 사이를 출입하면서 좌우를 묻지 않은지 이십여년에 일찌기 걸퇴시를 지어 내어 드려 이르기를,

五更殘夢寄松關  / 오경의 잔챙이 꿈을 송관松關에 맡겨
十載低徊紫禁間  / 십년을 자주빛 금중 사이에서 나즈막히 배회했군요

(*가장 깊은 밤인 삼경은 밤 열한시 부터 다음날 한시까지니 오경은 새벽 세시에서 다섯시 까진데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오경이 흔히 인생이 "한바탕 큰 꿈" "일장춘몽"이란 말을 두고 한 것이라면 자잔히 남은 여생을 송관松關(조선이후 송도라 부르기도 한 개경의 진산인 송악산 밑의 관문 즉 고려궁궐을 지칭하는 것으로 봄) 즉 뒷구의 자금간紫禁間과 푸른산을 원망하다 등과 생각해 궁궐의 울 안에 맡겨 승통직으로 지낸다는 뜻으로 해석할수 있을것 같다 장자 제물론 편에,
예전에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연 나비다 스스로 뜻대로이고 장주임을 몰랐다 아순간에 깨니 두런두런 장주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되었는가를 모르겠다 장주와 나비는 반드시 분간이 있을 것인데, 이를 물화物化라 이른다)

早茗細含鸞鳳影  / 이른차는 가늘게 란봉의 그림자를 머금었고

(*따라서 여기 조명早茗이 흔히 새벽에 일어나 잠깨는 차로 마시는 아침차 보다 일찍 딴 올차를 말하는 것으로 볼수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본다면 비록 요일 자신은 개인적으로 백운간에서 스스로 자유롭게 높이 비상하는 것만 생각했다 하더라도 요일의 사명이 끝남과 함께 어두운 밤을 깨고 이제 부터 채색 란봉鸞鳳의 아침이 열려 지리란 것을 암시 기원하는 차로 볼수있다 란鸞도 봉새류인데 봉鳳이 수컷 황凰이 암컷을 말하는데 비해 란은 노래하는 것을 두고 말하는 이름이고 봉황은 춤추는 것으로서 말한 것 같다 이아처럼 작자불명의 글로 전해온 산해경山海經의 해외서경 편에,
"이 여러 옥야에는 란새가 스스로 노래하고 봉새가 스스로 춤추며 봉황의 알은 백성이 먹고 감로는 백성이 마신다 하고픈 바를 스스로 쫓아한다..." 라는 구절이 있으며 해내경 편에도,
"난새가 있어 절로 노래 부르고 봉새는 절로 춤춘다 봉의 머리는 덕德이라 말하고 날개무늬는 순順이라 말하고 가슴무늬는 인이라 말하고 등무늬는 의라 말하는데 나타나면 천하가 화和한다" 했으며 서차이경 편에는 난새 또한,
"서남으로 삼백리에 녀상女牀의 산이라 말하는데 그 양지에는 적금赤金이 많고 그 그늘에 돌먹이 많으며 그 짐승은 범 표범 무소 코뿔이가 많으며 새가 있으니 그 상이 꿩 같은데 오채의 무늬로 란새라 이름한다 나타나면 천하가 안녕한다' 라고 했다.
봉은 후한 허신의 설문해자에 신조神鳥라 했고 또,
"봉새가 동방 군자의 나라에서 나와 사해의 밖에 날아다니다가 곤륜산을 지나 지주砥柱에서 마시고 약수弱水에 씻으며 저물면 풍혈風穴에서 묵는데 나타나면 천하가 안녕한다"했으며 공연도孔演圖에는,
봉은 화정火精이 되어 단혈에 살며 오동이 아니면 깃들지 않고 대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고 예천醴泉이 아니면 마시지 않고 몸에 오색을 구비했으며 울음은 오음에 맞고 도가 있으면 나타나고 날면 뭇새가 따른다"했다 원래 이미지상 용이 꼬리 두들기고 올라가는 남성적 힘인 뇌흥을 상징하는데 비해 봉황은 조양朝陽으로서 여성적 문채를 상징하여 이른바 관상법에서도 봉황의 상을 용비봉무龍飛鳳舞라는 말처럼 용흥에 배합할 여자의 일반적 귀한 상으로 보았으며 이는 곧 이전의 문무 양반시대에는 양반이 서로 저마다 역할을 적합히 어울려 내는 것으로도 비유해 볼수있는다 그러나 고기가 용화龍化 된 것을 용이라 하는데 뭍짐승이 용화 되면 기린이 되고 새가 용화 한 것은 봉황이 되는 것이니 주역에서 특히 건괘에 잠긴용,나타난용,나는용,항용등의 효사가 있는데 여기 말하는 용을 국한해 보지 말고 각기 입장에 따라 용화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장자 소요유 편에,
"북쪽 어두운 바다에 고기가 있어 그 이름을 곤이라 한다 곤의 크기는 몇천리 인지 모른다 화하여 새가 되면 그 이름을 붕이라 한다 붕의 등은 그 몇천리 인지 모른다 이새가 해운海運하면 장차 남쪽 어두운 바다로 이사 하는데 남쪽 어두운 바다란 천지天池다 제해란 것은 괴이함을 서지한 것이다 제해의 말에 가로되 붕이 남쪽 어두운 바다에 이사함에 물을 삼천리 치고 두들겨 회오리치며 오르기 구만리해서 여섯달을 날아가 쉬는 것이다 아지랑이야 진애야 생물이 이로 숨쉬어 서로 불어 댐이야 하늘의 창창함이 그 정색인가 그 멀어 이를바 없음인가 그 아래로 내려 봄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곤은 고기 이름으로 그중에 어란魚卵이 조鳥로 용화한 것인데 용화도 용화 나름이지만 이는 대표적인 것으로 새로 용화한 것 답게 파도 즉 물의 문채를 삼천리 치는 것이다 원래 고려에서는 청자가 생산 되면서 청자사발등에 아직 안료없이 흔히 획화한 봉황무늬의 그릇이 있었는데 무신난이 일어난 무렵부터 상감자가 나오면서 봉황대신 백토로 학상감한 청자가 등장하는 것이다 봉황도 백상감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닐텐데 백상감에는 학의 흑백하고 결백한 이미지가 더 어울려서인지 숱한 청자 가운데 백상감한 봉황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으니 이는 당시 그릇제작할때 봉과 학 그리고 문양에 대한 의식적이고도 분명한 개념을 두었다는 것이 의미된다 다만 이는 상징적 표현에서 그렇게 된 것이고 실제 인간상에서는 어찌보면 봉황이 될 만한 물건이라야 역시 시대에 따라 학이 될수있는게 아닐까 한다 산해경의 남차삼경 편에,
또 동쪽으로 오백리에 단혈丹穴의 산이라 말하는데 그 위에는 금과 옥이 많다 단수丹水가 나서 남쪽으로 발해에 주입한다 새가 있으니 그 상이 닭 같으며 오채의 무늬인데 봉황이라 이름한다 머리의 무늬는 덕이라 말하고 날개의 무늬는 의라 말하고 등의 무늬는 예라 말하고 가슴의 무늬는 인이라 말하고 배의 무늬는 신信이라 말한다 이 새는 음식이 자연하고 스스로 노래하고 스스로 춤춰 나타나면 천하가 안녕한다" 하였는데 그 상이 닭과 같다는 데서 사기 문선등의 옛 인용문에는 학과 같다고 되어있기도 하다 일찌기 공자가 초나라에 갔을때 초광楚狂 접여가 봉아 봉아 어찌 덕이 그렇게 쇠했는가 지난 것은 그만이고 오는 것은 쫓을수 있는것 하면서 노래하는 것을 듣고 초에서의 유세를 포기하고 돌아왔다는 일화는 공자가 봉이 되려고 했지만 결국은 학에 더 가까운 경우가 되었다 하겠다 하여간 요일의 이 시에서 말하는 란봉은 적갈색 조선 석간주사기 중에 암적색 으로 짙은 것과 비슷한 색의 흑유자로 유명한 중국 송대 강서성에 있은 길주요吉州窯의 전지첩화문흑유잔剪紙貼花紋黑釉盞의 좀 새롭고 이질적인 그릇으로 통해 보는 란봉의 무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잔은 현존유물이 더러 있으며 송대 길주요 자기를 소개하는 도록에서 대개 빠지지 않고 소개되며 바다거북껍질인 대모玳瑁의 황갈색 얼룩덜룩한 문양인 대모문흑유자와 나뭇잎을 붙인 목엽문잔과 함께 송대 길주자기의 문양 가운데 대표적인 것인데 란봉문은 철채류로 그린것도 있지만 대개 첩화한 것으로 첩화문자기란 것은 길주요 흑유자의 문양이 대모문과 함께 흔히 이중유二重釉 방법에서 나온 것인데 먼저 기본유인 저유底釉를 바르고 란봉이나 각종 꽃무늬등이 도안된 종이를 이위에 오려 붙이고 다시 그 위에 희거나 누런 면유面釉를 뿌려 씌운 다음 종이를 걷어내고 구우면 기본유색의 문양이 나타나는 것으로 대모문도 이런 이중유방식에 준하는데 내 생각으로 이는 오대 송초간의 사람인 도곡이 청이록에서 말한 차 유희의 하나인 루영춘법漏影春法과 통해 자기제조 기술에도 응용된 것으로 보인다 루영춘법이란 아로새긴 종이를 찻잔위에 붙이고 그 위에 찻가루를 뿌리고 종이를 제거해서 꽃모양을 만들고 따로 여지열매의 살로 잎을 하고 잣이나 은행류의 진물珍物로 꽃술을해서 끓는 탕을 점주點注해 저어 마시는 것을 말한다 길주요도 지금껏 고고조사에 의하면 당말 오대시기즈음부터 도업이 개시된 것으로 나타나는 듯하며 명나라 때의 동창지에,
"...오대시에 이르러 백성이 그 땅에 모여 밭갈고 도陶했다 이로 말미암아 우물.촌락과 성시 묘우와 절 도관이 비로소 창건 되었다..."

異香新屑庶+鳥古+鳥斑 / 새로 가루한 남다른 향으로 자고반 잔인데

* 자고반 무늬는 현재 중국도자사나 예술사에서 정론定論이 내려지지 못한 가운데 일찌기 일본에서 이에 대해 논쟁이 일어나 대체로 두종류로 나뉘는데 첫째는 건잔의 유적油滴을 말한다는 것이고 또 한 일파는 자고새의 등에 있는 자주와 적색 깃이 서로 섞인 가닥무늬와 서로 비슷하다는 것인데 또한 중국에서 일설로 자고반은 길주요에 있는 것으로 건요에 있다는 것은 착오라는 설까지 있지만 별 근거는 제시되지 못하고 현재 중국 도예계에서는 대체로 자고반은 유적이라는 설을 쫓고있다 그것은 자고새의 깃털무늬가 등은 메추리나 사계沙鷄등의 여타 새의 깃무늬와 비슷히 볼수있지만 유독 가슴깃 무늬에 둥근 은점이 있어 이것이 유적과 흡사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지금 분류하는 자고새류에는 여러 종류가 있을수 있지 않겠나 하겠지만 옛 중국인이 말한 자고새는 당나라 유순의 영표이록에 보면, 자고는...가슴앞에 흰 둥근점이 있고 등위에 자주와 적색털이 사이해서 그 크기가 야계野鷄만 하며 서로 대해 잘운다.했으며 송의 범성대는 계해우형지의 지금志禽 조에서, 자고는 크기가 죽계竹鷄만한데 좀 길며 머리는 메추리 같고 몸의 무늬도 또한 그런데 오직 가슴앞의 흰점이 정원형으로 구슬같다 사람이 잡아 식용한다.하였다 또한 도곡의 청이록에,
민中造茶盞 花紋자고斑點試茶家珍之라고 한 자고반에 대한 기록에 대해,
花紋자고斑 點試茶家珍之라고 끊어 읽으면,
민땅 가운데서 차잔을 만든 것이 꽃무늬가 "자고반"으로 "점시차가"는 진중해 한다.
라고 되지만,
花紋자고斑點 試茶家珍之로 끊어 읽으면,
꽃무늬가 "자고반점"으로 "시차가"는 진중해 한다. 로 해석할수 있어 더욱 반점을 말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종래는 자고반에 대해 송의 축목이 희녕3년(*1239)에 지은 방여승람에서 "토호잔은 구녕현(*복건성에 있음) 수길진에서 난다 황산곡의 시에 건안의 자완 자고반이라 말했고 또 채군모의 차록에서 건안에서 만든 바의 흑잔은 무늬가 토끼털 같다.했다 그런데 그 털색의 다른 것은 토인이 이르기를 호변잔毫變盞이라 하는데 그 값이 심히 높고 또한 더우기 얻기 어렵다." 는 데 따라 청의 주렴은 도설에서 자고반은 토호잔이라 했으나 역시 청의 장형은 건잔을 읊은 그의 시에서
"혹 점점히 자고반이 있고 또한 삼삼參+毛參+毛히 토끼털 돋았네(*줄茁)"
라고해서 토호와 자고반은 분명히 다른 것으로 보았고 진류는 도아에서
"토호잔은 자고반인데 단지 자고반 흔적은 넓고 토끼털은 침처럼 여위어 또한 미미히 같지않음이 있다"
라고 했다 내가 알기로 아직 앞서의 자고반의 논의에 위 요일의 걸퇴시가 인용 참작된 것은 없는 것으로 아는데 어쨌건 당시 고려에서도 차의 유행에 따라 차와 함께 송의 이름난 잔도 쓰여진 것을 알수있을 뿐 아니라 자고반의 정확한 정론定論에 대한 단서를 줄것으로 보인다)

自憐瘦鶴翔丹漢 / 여윈학이 붉은 은하수 하늘에 나래짓 하는 것을 스스로 가련해 하고
久使寒猿怨碧山 / 추운 원숭이로 오랬동안 푸른산을 원망하여 그립게 했습니다

(*단한丹漢은 여름의 뜨거운 밤하늘을 말하는 것으로 본다 학은 새벽을 알리는 닭과 상대적으로 밤을 울어 알리는 새로 흔히 사대부가나 절간같은 곳에서 뒤뜰에 길렀음 주역 풍택중부괘의 구이효사에도, 외치는 학이 "그늘케" 있으니 그 子가 화답한다 내 좋은 작爵이 있으니 내 너에게 주어 얽으리.라고했는데 학이 텃새처럼 옮기지 않고 지내는 경우도 있다지만 겨울철새다 역시 이인로의 같은 글에 지리산 청학동 얘기가 있으니 이런 말들이 나오는 것은 당시 보현사에서 무신란이 일어 나면서 고려문신쪽의 인물들이 벽지로 피신하여 지낸 시대상과 유관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단지 한때 일부인사 들이 피신한 것일 뿐 아니라 이후 마치 근년에 이르기 까지 이른바 "군사정권"시절 데모가 잦았던 만큼이나 틈만나면 각지에서 민란이 끊이지 않아 그에 따른 진압이 되풀이 되는 장기적 내란상태에서 유배되거나 스스로 피신하게 되는 일이 다반사로 생기는 것이다 작자나 시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전하지는 않지만 고려가사로 전하는 청산별곡에,
살으리 살으리 살으리 랏다 청산에 살으리 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으리 랏다
얄리 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울어라 울어라 새야 자고 일어나 울어라 새야
너와 시름한 나도 자고 일어 우니노라
얄리 얄리-----  
가던새 가던새 본다 물아래 가던새 본다
녹 묻은 쟁기를 가지고 물아래 가던새 본다
얄리 얄리 ----
이렇궁 저렇궁 하야 낮이란 지내왔은데
올 이도 갈 이도 없은 밤이란 또 어찌 하리라
얄리 얄리-----
어디라 던지던 돌코 누구이라 맞히던 돌코
미운이도 고일이도 없이 맞아서 우노라
얄리 얄리 ----
등의 가사가 있는데 여기서 다른 부분은 그냥 유배지에 고립된 같은 생활을 말하는 듯한데 돌에 대한 부분은 유독 의아한 데가 있어 분명히 작자의 현 처지를 유래한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장터에 돌을 던져도 박복한 사람부터 먼저 맞는다 라는 말처럼 단지 어떤 하소연 할바없는 숙명적 불운에 걸렸다는 뜻으로 말한 것인지 아니면 말대로 종래 싸움에서 흔히 있는 투석전을 두고 말하거나 이런 난리통에 무고히 연좌되는 데로 희생당함을 말한 것인지 알수없지만 하여튼 이런 노래가 개인적 동기와는 다소 어떤 차이가 있건 없건 다음해서 그 가사가 공감을 일으켜 새타령처럼 일반적 정서를 얻었다는 것은 소홀히 볼수없는 문제다
또한 시경 학명 시에,
"두루미가 구고九皐에서 울으니 소리가 야野에 들리네
고기는 잠겨 깊은못에 있고 더러 물가에 있다
즐거운 저 동산에는 심어놓은 박달나무있고 그 아래 개암나무 있네
타산에 돌이 숫돌 할수있는 것
두루미가 구고에서 울으니 소리는 하늘로 들리네
고기는 물가에 있고 잠겨 더러 깊은못에 있다
즐거운 저 동산에는 심어놓은 박달나무있고 그 아래에 닥나무있네
타산의 돌이 옥을 갈수 있는것"
락樂은 달리 락이 아니라 험함에서 해결돼 벗어나는 것을 말하여 복복 하지만 죄를 짓고 벌을 피할수 있으면 그보다 더 큰 복이 어디있겠나와 "천만다행"이라 말할때 흔히 이해되어지는 의미와 말의 비슷한 적용이 있으니 이시는 난세에 비록 벽진 곳에 어렵게 처해서도 오히려 타산지석으로 삼아 부지런히 수신함으로 백성의 스승이 되어 일깨우고 지성이면 감천으로 때를 기다린다는 것이 요지로서 예전에 조정에서 은자를 부르는 검고 흰 표식의 글을 학서鶴書라고 불렀다 시경 대아 편의 권아 시에,
봉황이 날아 획획 그 나래치다가 또한 머물러 앉네
왕은 길사吉士가 많아 오직 군자 만을 사신하여 천자에 사랑받네
봉황이 날아 획획 그 나래치다가 또한 하늘에 다다르네
왕은 길인이 많아 오직 군자에게 명해 서인에게 사랑받네
봉황이 울으니 저기 높은 언덕 이로다 오동이 나있으리니 저기 조양朝陽이로다
수북수북 무성하며 옹옹 개개히 울음 우도다.
시경에서는 그렇게 봉황을 그렇게 신화적으로 묘사하진 않았지만 앞에서 학이 고기가 잠길때는 야에 울고 물가에 있을 때는 하늘에 울린다 한 만큼이나 여기서도 봉이 천자와 백성 사이를 오가며 소통하는 신조神鳥로서 활약 함을 말하고 있다 아마 요일은 마른 체형에 비학문상감자가 유행하던 이시기 대표인물이겠으며 한편 비학문상감자가 시대상을 반영하지만 단순히 무신정권을 고발하는 측면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며 오히려 당시 무신정권에 기꺼이 환영되 받아질 요소가 있었다.
*동자나 원숭이가 흥겹게 머루따는 조각의 고려청자가 있는데 문신과 어느정도 타협이 이루어져 무신정권이 비교적 안정되던시기 나온것으로 보인다 역시 요일의 이 시 이후인 것이다)

願把殘陽還舊隱 / 원하옵건데 남은 볕을 쥐고 옛 은거로 돌아감으로
不敎巖畔白雲閒 / 바위두둑의 흰구름이 한가하지 않게 해주소서

*상감술이 고려청자에 등장하기까지 과정을 보면 상감술 자체가 갑자기 창안된 것은 아니지만 자기에 까지 등장한 것은 실로 자기 중에서 고려청자의 독창한 모습이라 하겠는데 중국에서도 송대에 자주요에 철채가 잘 벗겨지지 않게 하기위해 획화 한 위에 안료로 그리는 것이 있고 이는 청 주염의 도설에 정요에서 보인는 원나라 산서성의 창금장 팽균보에게서 보이는 창금술과도 관련 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창금술이란 옻칠을 하고 역시 무늬를 그은 다음 그위에 금채를 바르는 것을 말한다 이는 나무가구에 자개를 박는 나전감이 지금껏 상감자의 원류를 밝히는 한 좌증으로 내놓아 지는 것과 함께 서로 유관하다고 할수도 있지만 그러나 상감자는 특히 이전부터 청동기에 금은실을 박아 넣는 금은감에 보다 더 직접적이고 분명한 관련이 있다 고대에 청동기를 주물해 내면서 그릇의 밖에는 돋은 무늬를 낸 관款과 안에는 들은 무늬의 글을 넣은 지識가 있어 이것이 서로 관지가 되어 오늘날 서화에서 양각의, 호나 길어를 넣은 도장과 음각의, 이름을 새긴 도장을 찍는 낙관으로 응용 전해지기도 하는데 전국시대 말엽즈음부터 야금술의 발전으로 보다 보다 강한 송곳이 나와 청동그릇에다가 주물하고 난뒤 그대로 음각으로 파 그어내는 것이 등장하기 시작해 이로서 그릇의 연대를 구분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가야의 무덤에서 칼자루에 금은감을 한 것이 발견되어진 것이 있는줄로 안다 고려자기가 당시 청동기를 그대로 모양해 만든 것이 다반사이니 그 문양술 또한 응용됨이 무리가 아닌 것이다.

上大加稱賞 謂師曰昔人云 莫訝杖藜歸去早 故山閒却一溪雲 可謂先得師之奇趣 因和其詩以賜之曰
상은 크게 칭찬의 감상을 더하여 대사에게 일러 말하길,
옛사람이 "의심치 않는다 청려장이 일찍 고산故山의 한가한 곳 한 시내의 구름에 돌아감을" 이라 일렀으니 가히 먼저 대사의 기취奇趣를 얻었다 이르겠다.
인해서 그 시에 화답해 내려 말하길,

祖師心印製機關 / 조사의 심인心印은 기관機關을 제製했으니
卽悟眞空一瞬間 / 바로 진공眞空이 일순간임을 깨달았다
宴坐爐添沈水瓣 / 잔치자리에 화로는 침향꽃판을 보태고
迎賓筑破紫苔班 / 손님 맞는 지팡이는 자주빛 이끼 반점을 깨누나
好將經論傳緇侶 / 장차 경經과 논論을 승려에게 전하기 좋아하고
莫以行藏憶舊山 / 옛산을 그리워해 행적을 간직하려 마시며
夕磬晨香勤禮念 / 저녁 경磬소리 새벽 향불 예불과 념불을 부지런해
願令愚俗得安閒 / 원하건데 어리석은 속인이 편안 한가함을 얻게하기를

歷觀古今名緇秀衲 得被君王寵賜 以篇章者多矣 未有特次其韻  其意如此款密 昨詣大叔丈室 示以御製此篇 宸翰飛動 蘭麝郁然 正冠肅容 궤而讀之 若瞻天日於雲表 祥光瑞色爛然溢目 誠可仰也
역래로 고금의 이름난 중과 빼어난 화상을 보건데 글편과 문장으로 군왕의 총애 내림을 입게된 자가 많을 것이나 특히 그 운에 따른 것은 없었으니 그 뜻이 이같이 믿음직 밀접했다 어제 대숙의 방장에 뵈니 내게 어제御製한 이 글편으로 보이었는데 어필이 비동하고 난향과 사향이 울연해서 갓을 바로하고 용모 엄숙히 꿇어 읽으니 하늘의 해를 구름의 겉에서 보는듯하고 상서로운 광색이 찬란연 눈에 넘쳐 실로 우러럴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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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빈씨는 말한다 나는 청자에서 비색자秘色瓷의 원류가 한말漢末의 어지러움에 숨은 군자들에 의해 기틀해서 진晉에서 드러나려 한데 있음을 볼때와 또한 고려 상감자의 비롯이 난세에 처한 은군자들이 스스로의 처세와 수신으로 노력해 말하려 한 것과 결부되어 있음을 볼때 비록 시대와 사람은 달라도 각자 그들이 처한 환경에서 저마다 나타내려는 것의 어떤 고귀한 일치와 그들의 깊은 동경에 동감해 매번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츨처:네이버 블로그 도빈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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